연상호, 2025
신자유주의가 배태한 배금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자장 아래에서, 고성장 시대의 비윤리적 추행은 쉽게 용인되어왔다. 그러다 경제 성장의 그래프가 완만해지기 시작하자 이 추행들은 과거라는 미명 아래에 위장되고 은폐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관성은 종종 조악한 위장막을 뚫고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연상호 감독의 「얼굴」은 ‘기적’이나 ‘산업의 역군’이라는 낭만적 기호로 포장된 과오들을 플래시백으로 꾸준히 호출하며 극을 진행해 나간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세대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꾸며두지 않는다. 다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받아안아야 할 공동체적 숙제로 제시한다.
이 글이 해당 숙제의 정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막幕 구조를 통해, 그리고 동환과 젊은 영규를 동시에 연기한 박정민의 1인 2역의 의미를 통해 논의해 보려 한다.
인터뷰적 구조
먼저, 우리는 「얼굴」이 취하는 취재 형식 구조의 의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얼굴」에는 세속적인 인물들로 가득하다. 그중 눈에 띄는 이는 영규(권해효)를 취재하러 온 PD, 수진(한지현)이다. 수진은 정의로운 척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직업적 명리를 위해 약은 수를 쓰는 인물이다. 그러다 그녀는 미경(이진숙)과의 인터뷰 이후, 눈물까지 흘리며 사건을 끝까지 파헤치려 한다. 수진은 미경과 같은 여성으로서 당대 여성이 당한 부조리에 분개하여 각성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진의 가방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되어있는 이상, 그녀의 눈물은 진정성을 획득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얼굴」의 구조가 인터뷰 형식인 이상, 우리는 해당 영화의 부도덕과 부조리를 보고선 분노하는 우리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관람하며 우리가 느끼게 되는 감정의 진정성을 쉽게 허락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얼굴」은 관객이 느끼는 분노나 슬픔, 그리고 부끄러움과 같은 감정을 미스터리 장르의 오락적 카타르시스로 봉사케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의심스러운 분노와 슬픔을 품은 채 극장을 빠져나와 세상에 대입시킬 범위를 조심스레 탐색해야 한다.
같은 얼굴
동환에게 아버지와 닮았다고 말하는 수진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 말은 표층적으로, 결국엔 동환도 자본주의의 율법 아래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영규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냉소 섞인 공격이다. 그러나 동환과 자신이 닮았다는 말을 듣고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던 영규처럼, 해당 대사를 곱씹어보자면, 이것이 「얼굴」을 관통하는 가장 처연한 대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아버지와 닮은 것은 비단 동환만의 특징이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각자의 아버지와 닮았다. 더욱이, 한 배우가 두 배역을 연기했기에 관객에게 동환과 젊은 영규는 사실상 같은 인물이다. 말하자면, 산업화 시대의 과오는 한 세대의 특징으로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환경이 부추긴 구조주의적 질병이다. 해당 시기를 살아왔다면 누구나 그런 과오의 가해자이거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유로 과거의 과오들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얼굴」은 동환과 영규의 마지막 대화에서 산업화의 질병을 ‘그땐 다 그랬어.’나 ‘옛날엔 어쩔 수 없었어.’와 같은 편리한 문장으로 선처받게 두지 않는다. 과오를 저지른 과거의 우리, 그리고 그 과오를 묵인하여 이루어낸 경제적 성취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지금의 우리는 모두 시대의 공동체적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며 심판자이다. 우리는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때때로 용서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드시 경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동환이 영규와 똑 닮았다는 설정은 곧, 동환의 얼굴에서 영희(신현빈)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영희의 존재는 자기 자식에게조차 계승되지 못한 채 매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남자면 ‘철수’, 여자면 ‘영희’라고 이름 붙여지듯이, 영희라는 이름은 편의성을 위해 여성에게 가장 흔히 붙여지는 이름이다. 그러니까 영희는 극 중 독립된 개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무명이거나 익명인 여성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영희는 시대의 일방적인 피해자이며, 그 어떤 유산도 남기지 못한 채 시르죽어 버린 여성들의 환유이다. 영화의 엔딩 시퀀스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결국, 「얼굴」은 미스터리라는 영화의 장르적 동력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시대의 희생자의 ‘얼굴’을 향해 가동했다는 것이다.
편리한 좀비화
잠깐 감독의 이전 작인 「부산행」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해당 영화의 장르는 좀비 아포칼립스이다. 좀비 아포칼립스의 장르적 특징은 사회 비판적 색채가 짙다는 것이다. 초반에는 좀비 자체가 거대한 재앙이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좀비는 하나의 환경으로 기능하게 된다. 해당 장르의 진짜 재앙은 좀비가 아니라 개인의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다.
「얼굴」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불친절하며 부도덕하다. 그들은 모두 타인을 인신공격하고, 성추행하고, 욕설하고, 얕잡아보고, 비꼰다. 그러고 보면 그들 또한 환경에 불과하다. 그들의 천편일률적인 부도덕은 인간을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좀비와 다름없다. 이러한 지점에서 「얼굴」은 「부산행」의 변주이며, 엑스트라가 특수분장을 하지 않은 좀비물처럼 느껴진다. 특정 주제 의식을 전하기 위해 한 시대의 인물들을 좀비로 치환시켜 주인공을 학대하는 것은 「얼굴」의 단점으로 충분히 지적할 만하다.
맺으며,
영희의 얼굴이 못생겼다는 걸 알고 난 후, 젊은 영규는 영희와 함께 거리를 걸으며 여태껏 자신을 기만해 왔던 사람들의 비웃음을 ‘본다’. 이 장면은 시점 쇼트로 제시되는데, 시각장애인의 생생한 시점 쇼트라는 특이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어쩌면, 해당 쇼트는 영규가 살아오며 축적된 상처와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허상이고 오인일지도 모르겠다. 영규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이지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안다고 말한다. 그 맹목적 탐미성이 겨냥하는 것은 돈이고, 그는 그것과 자신의 도덕성을 맞바꾸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으며 줄곧 작업을 해왔던 영규의 도장은 러닝타임 동안 단 한 번만 아름다웠다.
앞서 말했다시피, 「얼굴」은 마지막이 되어서야 관객에게 영희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 얼굴은 위장된 세계의 민낯이기도 하다. 극장 밖의 세계가 박색인 여성이 (혐오 표현으로써의 의도가 다분한) 장애인 취급을 받는 미개한 사회 논리로 작동한다면, 「얼굴」은 그 괴물 같은 세계의 민낯에 장애 판정을 내린다.
젊은 시절 주상(임성재)은 영규가 판 도장으로 계약서에 지장을 찍으면 아무 문제 없이 사업이 진행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산업화의 ‘부적’을 만드는 영규는 자신에게 친절히 말을 건네준 영희에게 공짜로 도장을 파준다. 영희는 하층 노동자이기 때문에 사업에 필요한 ‘부적’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영규는 순수하고 선한 마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도장으로 파 '유일하게 아름다운 도장'을 선물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얼굴」이 제시하는 찰나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 물질주의와 타협하지 않아 잊혀버린 사람들의 이름을 아름다운 글씨로 파내어 눈뜬장님들의 세계에 각인하는 것. 그 숭고한 마법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사소하지만 따뜻한 관심과 말 한마디라는 발견이 「얼굴」이 이루어낸 가장 빛나는 성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