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와 점멸과 느슨한 사랑,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 2014

by 우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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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이 카페에 앉아 시간을 때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이 정적이고 권태롭기까지 한 첫 장면에선 아이러니하게도 묘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이 감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다음 숏에선 무언갈 메모하고는 팔짱을 끼고 그들을 물끄러미 관찰하는 태훈(임형국)이 담긴다. 이제 무(無)인칭의 첫 장면은 태훈의 시점 샷으로 변모했다. 어쩌면 영화를 찍기 위해 고조에 방문한 태훈이 그곳 주민들을 응시하며 발견한 것, 그러니까 메모장에 적힌 문장이 삶보단 죽음이 가까운 노인들에게 풍기는 생명력의 연원을 설명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적한 시골 마을인 고조 시는 이제 싱그러운 활력과 거리가 멀다. 젊은이들은 거의 떠났고, 중장년의 주민들만 남아선 그들의 과거를 들려준다. 겉보기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 없는 고조에는 이제 죽음의 뉘앙스가 짙게 깔려있다. ‘연고 없는 사람들의 무덤’이 피라미드처럼 쌓여있는 이미지는 노쇠한 고조의 가까운 미래다. 그런데 여기서 태훈은 이것의 가장 대척점에 있는 첫사랑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태훈이 인터뷰하면서 로맨스에 대해 넌지시 질문하기도 하지만, 그가 능숙한 감독으로서 사랑의 이미지를 호출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직접 나서 돌올하였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고조에 대한 옛날이야기를 해달라는 질문에 인터뷰 대상자들은 자신이 느꼈던 사랑에 대해 기껍게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사랑은 추억의 필요조건인 셈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형식은 1부와 2부의 느슨한 연계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판타지아’적이다. 이 두 극을 어떻게 잇고, 또 떨어뜨려야 할까. 이 환상곡을 바라보는 여러 방법론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한여름의 판타지아」라는 큰 제목 아래에 ‘첫사랑, 요시코’와 ‘벚꽃우물’이라는, 완전히 독립된 두 영화가 배치된 형식으로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 두 영화의 관계성을 추측해보자면, ‘첫사랑 요시코’를 제작하던 중 예전에 배우가 꿈이었다는 유스케(이와세 료)를 인터뷰한 태훈이 그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껴 그것을 토대로 유스케를 주연 삼아 제작한 영화가 바로 ‘벚꽃우물’이 아닐까 한다. (이전에 만난 한국인 여성과 로맨스 같은 건 없었냐는 질문에 잠깐 머뭇거리던 유스케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포착한 뒤, 출국하기 전 밥 한 끼 대접하면서 영화 촬영을 제안했을 수도 있다.)

허문영은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에서 2008년 8월에 열린 시네마디지털서울에서 국제감독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한 지아장커가 수상작 선정 회의가 끝난 뒤 정성일에게 밝힌 견해를 옮긴다. “다큐멘터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다림(waiting)의 다큐멘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구축(making)의 다큐멘터리이다.”(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강, 2010, 273쪽)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1부 ‘첫사랑, 요시코’는 기다림의 극영화처럼 느껴진다. 지아장커가 진실을 담기 위해 이야기를 구축하여 그의 작품 속으로 편입시켰다면 장건재(혹은 태훈)는 거꾸로 이야기 속에 다큐멘터리를 투입 시켰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시종 사용된 점프-컷은 지아장커가 「24 시티」(지아장커, 2008)에서 비워둔 검은 프레임처럼 느껴진다. ‘첫사랑, 요시코’는 「24 시티」의 검은 화면과 달리 어떤 문장도 음각시킬 수 없는 점프-컷을 사용한 대신, 그중 하나를 선택해 ‘벚꽃우물’이라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지아장커는 다큐멘터리의 틀을 기조로 하되, 부분적으로 극영화식 연출과 편집을 도입한다.”(같은 책, 267쪽) 그대로 뒤집어 서술하고 싶다. 장건재는 극영화의 틀을 기조로 하되, 부분적으로 다큐멘터리식 연출과 편집을 도입한다. 이로써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영화라는 판타지적 형식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며 목가적 죽음의 깊이와 그것을 뛰어넘는 사랑의 관성이라는 층위에 도달할 수 있다.

‘첫사랑, 요시코’에서 우두커니 선 채 인물들을 흑백으로 관망하던 카메라는 ‘벚꽃우물’에서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트레블링-인 한다. 활력이 느껴지는 ‘벚꽃우물’에서 유스케가 혜정(김새벽)에게 들려주는 벚꽃 우물 전설은 의미심장하다. 목이 말랐던 홍법 대사는 자신을 위해 먼 길을 수고해준 노파에게 감동하여 마법처럼 우물을 만들어주었고, 그 물을 마신 후 젊어진 노파와 사랑에 빠진다. 대사는 금방 떠났고, 노파는 임신하여 잉어를 낳아 그 우물에 풀어둔다. 이 이야기에는 유스케의 장난기 섞인 허구가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 전설이 쓰여있는 안내문을 읽을 수 없는 우리 (그리고 혜정)은 어디까지가 전설의 내용인지 알 수 없다. 이 유스케 버전의 전설은 그야말로 「한여름의 판타지아」에 대한 환유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1부에서 태훈과 혜정을 안내해 준 유스케와 겐지(강수은)에게 영화의 방식으로 젊음과 풋풋함을 선물하였고, 떠나간 혜정과의 사랑의 부산물인 잉어는 ‘벚꽃우물’에서 유영한다. (‘벚꽃우물’의 유스케는 ‘첫사랑, 요시코’ 속 유스케일 뿐 아니라 겐지와 부자 관계이면서 동일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자주 ‘예술 작품’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영화는 정확히 언제 ‘예술’이 되고, ‘작품’이 되는 걸까.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가 작품이 되는 지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영화에서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전혀 다른 것일 터인 복수의 숏들이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넘어서, 같은 것의 반복임을 그때그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영화를 마주하는 것은 이 대담하기 짝이 없는 반복의 힘에 몸을 맡기는, 위험하고 상쾌한 체험이다.”(하스미 시게히코, 「존 포드론」, 이모션 북스, 2023, 48쪽) 혜정과 유스케가 나란히 걷는 뒷모습을 카메라가 조용히 따라갈 때. 그들이 연락처를 주고받고, 입을 맞추고, 포옹할 때. 그리고 불꽃 축제의 이미지가 연쇄하며 포개어질 때, 나는 이 ‘작품’에서 발아하는 탐미성에 압도된다.

정성일 평론가는 2015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의 인터뷰에서 “영화를 보다가 어느 순간 전혀 결정적인 장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법 같은 순간을 느낄 때가 있다.”라고 했다. 영화가 예술로 인식되는 순간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한다. 2부의 혜정과 유스케가 시노하라로 가는 길에 잠깐 차를 세우고 담배를 태우는 잉여적인 숏에서 나는 이 마법 같은 순간을 느낀다. 이 장면의 미묘한 침묵과 찰나의 눈빛은 사랑과 예술성의 보고다.


혜정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유스케의 표정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점프-컷으로 비워낸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시간의 표정이고, 실로폰의 음계이고, 태훈이 메모한 문장이며, 첫사랑을 닮은 노인들의 생명력이다. 그 모든 감각이 아름답게 점멸한다. 찰나의 폭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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