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어디까지 믿어야하나,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

백승환, 2025

by 우판다


신神과 신scene을 어디까지 믿어 볼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아들 이삭을 죽이려 한다. 제단 위에 이삭을 올려두고 칼을 들어 살해하려는 순간, 하나님의 천사가 급히 나타나 그의 믿음을 알았으니, 숫양을 대신 제물로 바치라고 말한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Frygt og Bæven)』(1843)에서 이 신화를, 윤리를 넘어서는 신앙의 도약으로 해석한다.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은 이 신화를 장르의 동력으로 삼는다. 버즈 아이 쇼트로 시작하는 오프닝은 이 영화의 제목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의 시점 쇼트인 듯하다. 시점 쇼트가 관객이 인물의 시각적 관점과 동일시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라는 것. 그리고 제목과 소재로부터 시종 전경화되는 신의 존재를 미루어 볼 때, 해당 오프닝은 관객을 신의 자리에 위치시키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시도는 얼마간 관객이 자신의 위치를 탐색하게 하지만 영화의 소략함으로 인해 끝내 이렇다 할 자리로 호출하지 못한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위치에 앉아서 등장인물들의 운동-이미지를 관람할 때, 관객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신을 (그러니까, 이 영화를) 어디까지 믿어줄 수 있는가?

13년 전, 어머니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대한 고해성사를 듣게 된 신부 도운(신승호)은 아들로서의 복수심과 신부로서의 신앙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는 자신에게 고해성사한 호준(이재환)을 추적한다. 호준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괴한들로부터 살해당한 후였고, 도운은 살인사건으로까지 번진 미스터리에 집착하게 된다. 한편, 해당 사건을 맡게 된 강력계 형사 주영(한지은)은 임신 중이다. 이전에 태아가 장애 가능성이 있어 낙태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는 그녀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데, 사건이 진행될수록 그 감정이 깊어져 간다.

본다는 것

앞서 신의 시점 쇼트에 대한 언급이 있다시피, 이 영화에서 본다는 것은 중요한 감각으로 설정되어 있다. 고해성사 후 도망가는 호준을 쫓아간 도운은 자동차와 부딪힐뻔하는데, 차량 속 인물은 그에게 눈 똑바로 뜨고 다니라며 공격적으로 말한다. 또한, 무당인 광운(박명훈)은 술을 마실 때마다 이것만 있으면 안 보이던 귀신도 보인다는 대사를 반복한다. 이러한 강조는 도운이 접신(혹은, 재림예수) 상태일 때에 도드라진다. 해당 장면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편집한 도운의 시점 쇼트는 신의 것이며 동시에 관객의 것이다. 그런데 이 인상적(이어야 할) 쇼트에서 오락적 효과 외엔 어떤 가치도 발견할 수 없다. 여태껏 관객을 호출한 쇼트들이 단지 객관적 쇼트였으며, 오락적 쾌감을 위해 봉사케 한 도구였을 뿐이라는 허탈함은 분명 큰 단점이다.

그러나, ‘본다’라는 감각은 이 영화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죽은 호준의 여동생인 호연(이지현)이 청각 장애인이라 수화로 대화한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주제 의식은 청각 언어로 전달되는 말보다 시각 언어인 수화의 내용에 더 기댄다. 종교를 다루는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에서 구원을 받는 유일한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무교인 주영이다. 모든 생명의 탄생은 축복받아야 한다는 호연의 수화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주영을 구원케 하고, 숭고한 결심에 이르게 한다.

허점을 들여다보기

‘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라는 제목의 단언과 미스터리/스릴러라는 장르의 이질성은 매력적일 수 있었으나, 다소 범박한 영화의 내러티브로 인해 끝내 부정교합의 인상만을 풍긴다. 따라서 관객이 차용한 시선은 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카메라의 특권적인 배려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또한, 이삭 대신 숫양을 제물로 바치는 결말로 인해 인간 제물 금지 선언으로 해석되는 아브라함-이삭 신화와 달리 사람을 죽여 구원을 받는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의 전개는 모티프가 되는 신화의 오인된 계승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은 그저 요령부득하며 오해로 점철된 영화일 뿐일까. 잠깐, 이제 내가 시종 던졌던 질문에 답해야겠다. 나는 이 영화를 어디까지 믿어줄 수 있는가? 이 영화의 내적 논리를 넘어 어디까지 도약해 볼 수 있을까?

아브라함을 공통의 신앙적 뿌리로 삼는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은 모두 한 분의 유일신을 섬기며 기본 계율 역시 사랑과 자비, 정의를 강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계율은 세 종교 모두 최상위로 두고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 종교적 계율을 계승하지 못한다. 현재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군사적 충돌과 분쟁은 이어지고 있다. 가자지구의 불확실한 휴전 상태를 비롯한 인도주의적 위기는 분명 종교적 계시와 가르침을 위배한다.

이제 종교와 영화의 부정교합은 종교와 현실의 부정교합으로 갈음된다. 살인을 위해 새하얀 위생복을 입은 도운과 신부로서 검은 신부복을 입은 도운의 모순적인 표정의 교차편집 위로 영화의 제목이 다시 한번 강조된다. 듬성듬성한 영화의 허점이 마치 신만이 알고 있는 미스터리라고 변명하듯,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은 그렇게 끝난다. 그러나 텍스트 안팎으로 미스터리해버리고만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의 영화적 허점은 어쩌면, 즉자적 영화로 실재하는 세계의 메타적 허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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