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봐도 되돌아갈 수는 없는 법, 「룩백」

ルックバック, 오시야마 키요타카, 2024

by 우판다


극장가의 침체로 영화 시장은 명작으로 평가받는 과거 작품 재개봉과 이미 검증된 IP의 후속작을 극장에 내거는 전략을 취한다. 최근에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시리즈나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에드워드 양의 영화 등과 같은 소위 불후의 명작들이 재개봉했고, 「나우 유 씨 미 3」(2025, 루벤 플레이셔), 「주토피아 2」(2025, 자레드 부시/바이론 하워드) 등 이미 친숙한 세계관과 캐릭터의 안정적 회수 구조에 기댄 영화들이 대거 상영되었다. 실제로 한국영화진흥위원회 관련 보도에선 2024년에 재개봉 편수는 84편으로 2023년 48편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는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IMDb·Den of Geek 등에서 확인되는 라인업을 보아도 익숙한 IP 재사용 비중이 크고, 스튜디오들이 IP 안전판에 투자하는 세계적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나우 유 씨 미 3」는 세대 간의 화합과 계승을 테제로 세계관의 색을 더하려 노력하였지만, 마술에 리바이벌은 힘든 법. 벌써 3번이나 반복한 마술쇼에서 신비감과 환상을 가지긴 무리였다. 「주토피아 2」는 체온을 나누는 포옹의 이미지를 통해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다양성의 힘을 사랑스럽게 전달했다. 그러나 육식·초식 동물이라는 대립항에서 포유류·파충류라는 대립항으로 확장되었을 뿐, 전작의 돌림노래라는 인상을 지울 순 없다. 두 영화가 전작으로부터 9년이라는 시간을 경유하여 우리에게 도착하였다는 사실을 곱씹어보자면, 제자리를 맴도는 영화의 소략한 비전에 씁쓸함을 느낀다.

재개봉하는 명작 영화들도 발달한 기술력을 통해 복원되어 보존되고 대형 스크린에서 재평가받는 것을 긍적적이라 볼 수 있지만, 창작 생태계의 다양성을 약화한다는 점. 그리고 의미 있는 재해석 없이 단순 상업화되는 것에 대한 비평적 반발을 피하긴 힘들다. 우리가 이러한 제자리걸음의 영화에게 다가갈수록 후퇴하는 꼴이 아닌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 영화 「룩백」(2024, 오시야마 키요타카) 또한 재개봉된 영화 중 하나다. 그러나 뒤돌아볼 것을 요청하는 영화의 제목과는 다르게 「룩백」은 단순한 과거 회귀의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말하자면, 「룩백」은 뒤돌아보되 뒷걸음치지 않는다.


2019년 교토 애니메이션 제1스튜디오 방화 사건과 포개어지는 「룩백」의 야마가타 미술대학 도끼 사건의 후유증은 「룩백」의 인상적인 플롯을 추동시킨다. 후지노는 4컷 만화를 통해 부조리한 세계로 쿄모토를 호출한 과거의 자신을 자책한다. 이때, 「룩백」은 또 하나의 세계를 그려내어 그녀에게 선물한다. 이 선물은 들뢰즈가 주장한 예술이 가진 거짓의 역량에서 기인한다. 거짓의 역량이란 현실을 다른 방향으로 다시 조합하고,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만드는 이미지의 힘이다. 예술은 사실을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틈을 만들어내며, 그 틈이야말로 개인이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그러니까 거짓은 현실을 숨기기 위한 기만이 아니라, 현실을 다시 쓸 수 있고 자신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창조적 힘이라는 것이다.

쿄모토의 부고를 듣고 그녀의 집에 찾아간 후지노는 자책하며 자신이 그린 4컷 만화를 찢는다. ‘나오지 마’라는 일념을 담은 만화 조각이 바람에 실려 문틈으로 들어간다. 이 문틈을 거짓의 역량이 만들어낸 (앞서 언급한 그) 틈이라고 생각하고 있자면, 개인과 개인 그리고 개인과 세계 사이를 갈라놓은 벽이 사실은 벽이 아니라 문이 아닐지에 대해, 거짓의 역량이 만들어낸 틈을 통해 그것을 인지하고 용기를 내어 열어 젖혀볼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해 막연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졸업장을 전하러 쿄모토의 집에 찾아갔던 일은 거짓의 역량의 준거점이 되어 시간-이미지를 재배열하고, 후지노가 다시 자신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도록 응원한다. 이제 영화의 제목인 ‘룩백’은 등을 보고 따라오는 쿄모토를 위한 애도의 뉘앙스가 아니라,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후지노를 위한, 또 하나의 낯선 세계의 존재적 뉘앙스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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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구관이 명관이다’와 같은 격언에 기대어 이미 지나간 것들을 찬미하고, 진정성을 탐색하곤 한다. 그러나 이 진정성에 대한 욕망은 무의미하거나 심지어 부정적일 수도 있다. 앤드류 포터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에서 진정성이 가진 통념을 해체하며, 진정성의 무비판적 숭배에 대해 그것이 사회적 맥락에서 조작적이고 허구적임을 지적한다. 그의 논지는 9·11 테러로도 이어진다. 그는 9·11 테러 이후, 10년 넘게 마드리드, 발리, 런던 등지에서 벌어진 연속 테러 공격을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이슬람과 근대의 충돌로 바라본다.


“이 연속 테러 공격은 과연 문명충돌의 도래를 알렸지만, 이 충돌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이라기보다 이슬람과 근대의 충돌이다. 그리고 관련 행위자는 지하디스트 대 십자군이 아니라 지하디스트 대- 더 적당한 용어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사용하자면 - 소비자다. 이것은 무함마드와 예수 중에 누가 더 섬길 만한가의 다툼이 아니고 무함마드와 레이디 가가 중 누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다.”(앤드류 포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노시내 옮김, 마티, 2010, 354쪽)


이 진단이 흥미로운 이유는 폭력이 단순한 증오의 발현이 아니라 잃어버린 진정성을 회복하기 위한 행위로 서사화된다는 점에 있다. 근대적 사회가 개인과 공동체의 의미를 훼손했다는 믿음은 폭력을 선택 가능한 하나의 옵션으로 포장한다. 그러고 보면, 9·11 테러는 「룩백」의 도끼 사건과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도끼 사건은 자신의 작품이 표절되었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이성을 잃고 저지른 폭력이다. 이 폭력은 무차별적인 살인이지만, 가해자 내부에서는 진짜 창작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행위로 정당화될 수 있다. 만약 사회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 훼손된 진정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번역된다면, 이 폭력은 9·11 테러에 덧입혀진 논리와 나란히 놓일 수도 있겠다. 폭력은 근대 사회에 대한 저항이자, 진정성을 되찾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정당화된다.

앤드류 포터가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고로의 귀결이다. 그는 9·11 테러 이후의 담론 지형에서 서구의 반전좌파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묘한 향응을 지적한다.


“미국이 사담 후세인의 바티스트 정권 전복을 계획했을 때도 좌파는 유사한 사고 경로를 거쳤다. 그들은 “석유 때문에 피를 흘리지 말라”(No blood for oil)고 외쳤다. 거기엔 침공의 유일한 이유가 석유 1갤런 가격을 우유 1갤런 가격보다 싸게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결과적으로 반전좌파들은 독재자의 주권을 옹호하고 여성의 권리를 수구적인 종교지도자에게 맡긴 채 테러리즘과 대량살인에 이유를 붙여주는 터무니없는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여기서 비극은 서구 반전좌파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간에 형성된 지적 연합이 '근대=나쁘다'라는 피상적인 등식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훨씬 복잡하고 다중적인 역학의 존재를 가린다. 현대 대중사회의 총체적 문제점은 진정성의 실종이라고 보는 서구인들이 많다.”(같은 책, 359쪽)


그의 비판은 명확하다. 근대를 전면적으로 실패한 체계로 간주하고, 그 바깥의 순수한 진정성으로 회귀하려는 태도는 세계를 구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폭력을 미화하고, 사유를 단순화하며, 우리를 야만의 세계로 이끌 뿐이다. 「룩백」의 도끼 사건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창작의 윤리를 회복하지 못했고, 다만 개인과 세계를 더 파괴했을 뿐이다.

물론, 근대의 소비주의와 물질주의, 세속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단지 지위 상승과 소외감만을 요구하는 근대에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의 시장경제체제가 인간이 시행착오 끝에 도달한 하나의 성취이자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현실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검증된 IP의 후속작 제작이나 재개봉 전략 역시 시장 논리가 선택한 합리적 대응으로써 얼마간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 시스템을 완전무결한 것으로 이상화해선 안된다. 문제는 반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반복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용기를 동반하는가, 혹은 단순한 회상과 회귀로 점철되는가에 있다. 우리는 인간이 가진 개별성과 창의성 그리고 예술의 역량을 통해 더 나은 세계로 나아 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열등감을 가지게 했던 쿄모토가 사실은 자신의 팬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지노의 발걸음을 닮은 진보를 수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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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적지 않은 관객들이 지금의 영화(예술적, 산업적 가치를 포함한)를 부정하고 대책 없이 욕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거나, 아니면 옛 영화들을 막연히 추종하며 아예 점점 더 먼 과거로 되돌아가 가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뒤돌아볼 가치 있는 영화라면, 오히려 회귀가 아니라 용기 있는 진보를 요구한다(애초에 영화도 근대의 산물이지 않은가). 그런 영화를 위해 기꺼이 뒤돌아보자. 거짓의 역량이 축조한 낯선 세계가 우리를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회귀와 반복으로 폐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후퇴하는 세계에서, 예술은 우리가 문을 열도록 하며 낯설고도 열린 세계를 마주 보게 한다. 그 열린 세계에서, 지금의 부조리와 나쁜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발차기가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