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희. 2024
「대도시의 사랑법」에 대해 쓰기로 한 결심에는 저어되는 지점이 있다. 내가 애초에 「대도시의 사랑법」을 그다지 훌륭한 영화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학적으로 특출난 구석을 발견하지 못할뿐더러 군데군데 아쉬운 부분이 눈에 밟혔다. 좋은 영화에서 발견한 탁월한 점은 자주 말하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말을 아끼는 편이다. 어떤 영화를 재밌게 본 사람들의 기분을 괜히 망칠 이유는 없다(작품을 깎아내리면서 영화에 대한 나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킬 마음은 없다). 그런데 왜 「대도시의 사랑법」에 대해 쓰기를 고집할까? 이 동기에 대한 연원은 잠시 후에 설명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을 들여다보자. 드레스를 입은 채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재희(김고은)가 뒤따라 올라온 흥수(노상현)를 반긴다. 카메라는 둘이 공유하는 손목의 문신과 함께 각각 자상과 담배를 강조한다. 그러고는 둥실 떠올라 부감으로 서울의 전경을 비춘다. 해당 쇼트의 도회지는 흉터와 담배 연기를 품고도 퍽 아름답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강조된 이 ‘대도시’는 지극히 정물적이며, 부도덕하고 부조리한 세상의 환유 외에는 어떠한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다. 그리고 재희와 흥수는 러닝 타임 내내 대도시의 역할로부터 상처받고 불평한다. 그러다 보니 대도시라는 환경은 현실에 만연한 부조리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선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인물을 학대하려 지어 놓은 세트장으로 느껴진다.
물론, 극 중 자아정체성이 뚜렷한 개인과 성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이 허무맹랑하다거나 과장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지나치게 극화되어 있다. 성희롱하거나, 바람피우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말로 상처를 주는 장면들은 자주 극화되어 분노를 스펙타클화한다. 해당 장면들에서 관객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안락하고 안전한 극장의 좌석이거나 주인공과 동일시된 위치라고 생각하고는 부조리와 폭력에 마음껏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의 자리는 사실,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이거나 학교 축제 때 싸움을 관망하는 구경꾼 혹은 경찰서에 잡혀 온 취객의 자리와 더욱 가깝다. 어쩌면 억울함과 분노를 일종의 쾌락으로 소비하기 위해 인물들의 학대를 은연히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위장된 분노는 무엇을 호출할 수 있는가? 편리하게 쟁취한 도덕심은 무엇을 호명할 수 있는가?
또 하나 아쉬운 지점은 영화가 단점을 스스로 인지한 채 편리한 내적 텍스트 몇 마디로 그것의 면죄부를 취득한 양 전개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유학을 다녀온 재희나 외국으로 떠나고 싶은 흥수는 은근히 서울에 대한, 그러니까 한국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 인물들이 자국에 대해 시종 취하고 있는 냉소적 태도는 경계할 만한 것이다. 「대도시의 사랑법」 또한 이 점을 인지하고 있는지, “파리 사람들은 영화에서처럼 게이여도 별로 신경 안 쓰고 그러나?”, “야, 어디에나 꼴통은 있어. 밀도가 좀 낮을 뿐이지.”와 같은 대사를 영화 내부에 심어둔다. 이러한 내적 텍스트는 언뜻 영화가 배태한 오류를 향한 정면돌파와 개선의 시도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어떠한 태도 변화도 꾀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만적이다. 영화의 약점을 내러티브의 층위에서 스스로 드러냈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무마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파리, 13구」(2021, 자크 오디아르)나 「리턴 투 서울」(2022, 데이비드 추)과 같은 영화들을 포개어보면, 애초에 이러한 내적 텍스트들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말이 나온 김에 「대도시의 사랑법」이 타 작품들과 상호텍스트성을 구축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타 작품들을 노골적으로 호명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지으려 노력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1942)을 비롯해 「해피투게더」(1997, 왕가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 마르셀 프로스트) 그리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루카 과다니노)과 같은 작품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런데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러한 작품들과 병렬할 수 있는가? 단순히 영화의 (혹은 영화가 추구하는) 정취를 위해 타 작품들을 견인해 왔을 뿐이라는 감상이 든다.
신입생 환영회 장면에서 흥수와 대학교수는 『이방인』의 (그 유명한) 첫 구절을 각자의 언어로 주고받는다. 그리고 영화는 곧장 홀로 담배를 피는 재희의 쇼트를 배치한다. 이것은 재희를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나 작가인 카뮈와 동일시 하려는 직접적인 시도처럼 느껴진다. 짐작건대, 알제리 전쟁에 대한 발언으로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과 알제리 그리고 우파 모두에게 공격받은 카뮈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수호(정휘)는 흥수에게 「해피투게더」에 나오는 주인공을 닮았다고 한다. 흥수는 장국영을 말하는 거냐고 묻는다. 자살 기도를 하던 흥수가 스스로 장국영과 접점을 찾으려는 것(장국영은 동성연애 스캔들에도 휩싸인 적 있다.)은 내부 텍스트의 층위에서는 자연스럽지만, 그 바깥 층위에서는 작위적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경우에도 깊이 있는 상호텍스트성이 조탁 되지 못한다. 소략한 뉘앙스를 위해 타 작품과 영합하기보단 조금 더 숙고하여 영화의 층위를 다채롭게 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잠깐, 그렇다면 「대도시의 사랑법」은 그저 범박한 태작일 뿐인가?
‘잘생기고 몸 좋은 게이 남사친’이라는 오락적 헤테로 마케팅과 주제의식만을 위해 소용되는 남성성(여성 서사를 다루는 다양한 작품들에서 남성을 지나치게 우매화하거나 폭력화하거나 그게 아니면 철저히 배제 함으로써 그들을 여성의 목소리를 강화하려는 소비재로 전락시키곤 한다.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만을 잣대로 가동되는 수정주의적 태도에 대해선 기회가 된다면 추후 논의해 볼 수도 있겠다.)이 미만한 이 작위적 대도시에서 어딘가 반짝이며 거슬리는 지점이 있다.
임신 사실을 확인한 재희는 그 충격과 의사의 꾸짖음에 병원으로부터 도망쳐 나온다. 흥수는 격양된 재희를 위로하는데, 여기서 재희와 흥수를 담아내는 쇼트의 전경에는 나무의 이파리가 이물질처럼 껴있다. 관객의 응시를 방해하는 이파리의 존재는 거추장스럽다. 나아가 이러한 식물의 존재는 콘크리트와 매연으로 축조된 대도시의 이물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재희와 흥수의 환유다. 이들은 거슬리는 이물질이지만 분명 대도시의 부분집합이며, 청량함과 생명력으로 세상을 구성하는 아름다운 일원이다. 재희와 민준(이상이)의 결혼식장에 가득 배치된 식물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가까운 과거의 차별과 혐오를 재현하는 장면으로부터 과장됨과 극화됨을 지적하는 일은 얼마나 안전하고 편리한가. 약간의 사회 도덕적 진일보를 자축하며 잃어가는 것들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영화의 대도시와 우리의 대도시는 얼마간 향응한다. 그 틈에 앞서 언급한 생명력들을 포착할 수 있다면, 「대도시의 사랑법」의 가장 탁월한 성취를 발견할 수 있다. 거슬리는 것들의 매력을 톺아보는 것. 그것이 대도시 속 사랑의 방법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