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친구도 내 친구, 내 친구도 네 친구
2025.12.20. (금)
어제 결국 갈라파고스행 비행기 티켓을 샀기 때문에 원래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로 했던 친구네 가족에게 변경된 계획을 전해야 했다. 아주 오래전에 했던 약속이라 걱정되었는데 다른 한국인 동료분이 콜롬비아에서는 네일 예약 같은 것조차 전날 컨펌하지 않으면 취소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말에 생각해 보니 코스타리카에서도 항상, 언제나 약속이든 회의든 직전에 밀리는 것이 일상이라 불편한 마음을 좀 덜어서 연락을 결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안한 마음으로 감사하지만 갑자기 여행을 가게 되어서 크리스마스 때 코스타리카에 있지 않을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랬더니 아주 흔쾌히 알겠다면서 그럼 내일 토요일에 다른 일정이 없다면 같이 친구의-친구의 시골에 타말을 만들러 가자고 제안해 주었다.
타말은 거대 바나나잎으로 반죽을 묶어서 찐 음식인데, 코스타리카에선 크리스마스 음식이라 12월에 자주 타말을 먹고 또 우리나라 송편이나 전처럼 하루 날을 잡아 가족 전체가 모여 타말을 만든다. 중남미의 다른 나라 이야길 들어보면 타말이라는 음식 자체는 대부분 있지만 명절 음식으로 챙겨 먹는 곳은 코스타리카뿐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일은 또 다른 친구의 동생과 그 동생 딸의 합동 생일 파티가 있어서 또다시 이쪽에 연락해서 하루 전에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나는 일정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게 아주 스트레스받는데 내가 이러고 있으려니 마음이 안 좋다가도 또 코스타리카에서 겪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면 또 그렇게까지 마음 쓸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그래서 대신 오늘 하루 미리 친구 집에 방문해서 준비한 선물도 전해주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스페인어 수업을 마치고 오늘은 잊지 않고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서 친구 집에 도착했다. 친구 집에는 친구의 또 다른 친구가 지난 9월에 태어난 아들과 함께 놀러 와 있었다. 코스타리카에 처음 왔을 때는 우선 밖에 카페나 식당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집에서 함께 무언갈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신기했고 그 이후에는 나와 약속이 있는데도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다른 친구들도 왔다 가고, 하는 것이 신기했다. 이런 문화구나 싶다가도 한국에서 친구랑 친구 집에서 놀고 있는데 그 친구의 다른 친구가 집에 오면 너무 당황스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마 친구의 친구도 내 친구고, 내 동생의 친구도 내 친구고, 한국과 달리 가족 명절에도 애인이나 친구들을 초대하고 지인을 공유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초면인 듯 아닌 듯 다 같이 밥을 먹은 뒤, 생일 선물을 전해주러 왔지만 반대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여러 가지가 담긴 선물 꾸러미를 받았다. 그리고 친구 동생의 딸은 쿠로미를 좋아한다고 들어서 쿠로미 목베개와 아가용 젠가를 선물해 주었는데 리액션을 너무 격하게 해 줘서 내가 다 감동받았다. 그날 하루종일 목베개를 끼고 다니면서 또 나랑 젠가를 10판도 넘게 했는데 오늘 아주 친해져서 본인이 학교에서 좋아하는 친구인지 남자친구인지 모르겠는 비밀 이야기를 아주 많이 해줬다. 그러면서 본인 엄마나 이모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스페인어 이슈로 비밀 이야기의 절반 이상은 못 알아 들었기 때문에 비밀을 지킬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 또 그 친구의-친구의 남편이 집에 놀러와서 다 같이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무서운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한국의 여러 전설에 대하여 설명해줘야 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그냥 하얀 한복을 입고 다니는 처녀귀신이야기를 해줬다. 나도 왕년에 '무서운게 딱! 좋아!' 다회독자로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그렇지만 덕분에 코스타리카의 수많은 전설에 대하여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술판이 벌어져서 술을 마시고 가라오케를 하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가끔 티코들이 가라오케를 하자고 하면 코인노래방에 가자는 것은 아닐 테고, 적어도 집에서 블루투스 마이크로 연결해서 노래를 부르자는 것인가 보다 했는데 오늘 보니 티비에 '_(노래제목)_ karaoke' 의 영상 속 가사를 띄어놓고 따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이따 저녁에 댄스 수업에 가야 해서 술은 못 마실 것 같다고 했는데 그럼 수업에서 배운 거 여기서 연습해 보자고 춤을 추게 되었다. 또 어제에 이어 도망갈 우버를 부르는데 퇴근 시간이라고 잘 잡히지도 않는 우버.. 가봐야 할 것 같다! 했더니 빠르게 케이크에 촛불을 불고 택시를 타고 댄스 아카데미에 왔다. 오늘은 이번연도의 마지막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선생님이 우리 올 한 해를 같이 보냈는데 서로 어떤 사람인진 알아야 하지 않겠니! 하면서 둥그렇게 모여 앉도록해서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게 되었다.
코스타리카에 와서 매일 같이 자기소개를 하긴 했지만 대부분 랩실이나 회사 같이 내가 어디에서 와서 스페인어가 편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또 혹시 필요하다면 영어를 사용해도 되는 상황에서 이야기 했을 뿐이지 이렇게 진짜-진짜 세상에서 스페인어로 내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는 없어서 갑자기 긴장되었다. 그렇게 차례를 돌고 돌아 안녕.. 한국에서 온 에스더다..로 시작해서 자기소개를 하고 또 스페인어를 아주 잘하지 못하지만 또 너희들 말하는 건 알아들으니까 이야기해도 돼! 하면서 끝냈더니 선생님이 우리 중에 너보다도 못하는 애들도 아주 많다~ 너 잘한다~ 해주셨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알고 보니 나보다도 두 살이나 어린 청년이었고 이때부터 갑자기 한국에 있는 남동생과 오버랩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올해 마지막 춤 수업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내일 있을 장거리 여행을 위해 일찍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