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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더 Oct 29. 2024

EP074. 코스타리카에서 살아남기(上)

집 열쇠를 잃어버렸다. 하필 오늘.

2024.10.26. (토)


 오전 일정은 계획대로 흘러갔다. 알람을 듣고 일어나 언니들과 약속했던 시간에 그룹콜을 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좀 늦게 전화를 끊긴 했다. 그래서 정신없이 짐을 챙겨 나왔다. 원래 다니던 헬스장의 수업을 갈지, 지난주 토요일에 친구와 갔던 줌바 수업에 갈지 고민하다 헬스장은 주중에도 계속 다니니 줌바 수업에 가기로 결정하고 버스를 탔다. 지난주에는 친구와 택시를 타고 갔던 터라 버스는 처음이었는데 역시나 잘못된 버스였고 (도대체 버스 넘버링은 왜 안 하는 걸까?) 중간에 내려 결국 택시를 불렀다. 그렇게 조금 지각했지만 뒷줄에 자리를 잡고 수업에 참여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심지어 끝나고 강사님 인스타까지 땄다!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고서는 그 바로 옆에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벅스라고 이야기해 줬던 스타벅스에 와서 가을 신메뉴를 주문해 봤다. 생각해 보니 여긴 가을이 없는데 왜 가을맞이 신메뉴가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Apple crisp shaken espresso를 주문하면서 일반 우유를 오트밀크로 변경하는 발전을 했다! 코국 스타벅스는 바로 옆에서 커피콩을 가져오면서 왜 가장 작은 사이즈의 커피 한 잔에 만원이나 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친구가 이야기했던 대로 야외자리 뷰가 너무 좋았다. 한창 할 일을 하다 슬 집으로 걸어가기 위해 자리를 정리하고 나왔다. 오늘 저녁 10시에 투어 출발 예정이라 집으로 돌아가서 방도 정리하고 준비물을 챙기고 좀 쉴 예정이었다.


 몇 분 걸었을까 익숙한 노랫소리에 따라가 봤더니 한국 음식점에서 딘의 Instagram을 틀어놓은 것이었다. 순간 갑자기 가방에 있는 키를 한 번 확인하고 싶어졌다. 집 문 앞에 서기 전에 키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없는데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분명 열쇠가 있어야 할 가방 주머니에는 키가 없었다. 가방을 아무리 뒤지고 옷의 모든 주머니를 거꾸로 꺼내봐도 쌓여있는 영수증들 뿐이었다. 오늘 아침 수업에 늦어서 수업 시간에 겉옷을 대충 바닥에 벗어뒀는데 그때 떨어진 걸까? 수업을 들었던 광장으로 향했다. 기대와 달리 바닥에는 쓰레기 하나 없었다.


 주변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혹시 누군가 열쇠를 맡기진 않았는지 물어봤다. 꽤 큰 가게였는데 서로 묻고 묻다가 매니저까지 나와서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쇼핑몰 전체 보안 행정 담당실로 가보라고 방향을 알려줬는데 결국 매니저가 스태프 전용 통로를 통해서 사무실까지 동행해 줬다. 가는 길에 다른 경비원을 마주쳤는데 또 그분이 또 다른 경비원을 연결해 주고, 그리고 근처 다른 가게에까지 물어봐주셨지만 그 어디에도 없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혹시 찾게 되면 연락을 주기로 하고 이름과 번호를 남겨놓고 왔다. 걸어갈 힘도 시간도 없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당장 대문도 열 수 없어서 친구에게 연락해 도착하면 대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집에서 공용 공간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잃어버린 것을 인정하고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그 시점이 벌써 저녁 5시였는데 8시 30분까지 와줄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열쇠 자체는 얼마 안했는데 집 계약서 서명을 할 때 키를 잃어버려서 주인이 와서 열쇠를 내어줘야 한다면 꽤 큰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고 적혀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당시 보증인으로 서명해 줬던 친구에게 필요하다면 키를 복사에서 같이 갖고 있길 추천한다고 했는데 내가 잘 관리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했을까? 10시까지 센트럴에서 투어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집에서 9시에는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럼 키를 받고 문을 연 뒤 30분 안에 샤워를 하고 준비물을 챙기고 핸드폰까지 충전해야 하는데 계산이 안 나왔다.


 사실 물리적인 시간으로 가능한지 여부를 떠나서 이미 조금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는데, 여행 자체가 내가 편하게 생각하는 범위에서 벗어나는 일인데 지금 이런 상태에서 가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빠랑 전화를 하며 보증금은 포기하고 여행은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전화를 끊고, 코스타리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다들 밤 시간에 택시를 타면 금방 갈 수 있을 것이니 집주인이 30분까지 맞춰 온다면 한 시간 동안 준비하고 9시 30분에만 집을 나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그중 멀리 사는 친구 한 명은 시간이 부족하게 되면 본인이 우리 집까지 와서 픽업해서 센트럴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집주인이 오는 시간을 기다리며 공용 공간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계속 마주쳤다. 외출이 이렇게 밤까지 이어질 것은 예상하지 못하고 아침 운동 때문에 옷을 간단하게만 입었는데 그래서 더 민망했다. 생각해 보니 키는 없어도 공용 공간에서 요리는 할 수 있었다. 내 부엌으로 가서 힐링을 위한 불닭볶음면과 김밥을 만들어 먹었다. 그 사이에 아래층에 사는 친구가 오늘 고향에서 어머니가 올라오시면서 주고 가셨다고 라임을 한가득 주고 또 자기 홈타운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치즈라면서 구워 내 그릇 위에 올려줬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까먹고 있었는데 또 다른 친구가 그 사이 설거지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자기 번호를 주고 사무실에 출근하는 요일 하루를 빼고 항상 여기 있으니 대문을 열어야 한다면 언제든 전화하라고 했다.


 다들 입을 모아서 누구에게나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집주인 오면 키 받아서 준비물 챙겨서 여행은 계획대로 꼭 다녀오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정말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었는데 힘을 얻었다. 심지어 집주인이 오늘 온대? 나는 최소 내일이나 다음 주에 올 줄 알았는데 정말 잘 됐다!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긍정적인 방향으로는 생각도 못해봤는데..싶었다. 대기 시간 중에 짐을 어떻게 빠르게 챙길지 등 전략을 세우는데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일찍 집주인이 도착해서 키를 내주었다. 그리고 추가 비용 없이 최소의 열쇠 값만 받았다. 지난번에 부엌에 수세미 없냐고 물어봤을 때 네가 지금 호텔에 있는 게 아니잖니?라고 답하셔서 사람들한테 너무하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죄송합니다. 취소. 당신은 열쇠 천사.


 어느 때보다도 반가운 방과 감격의 재회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이, 핸드폰을 충전시켜 놓고 빠르게 샤워했다. 그리고 가방을 싸니 예정시간보다도 한 시간이 더 남았다. 그럼 처음 계획대로 버스를 타볼까? 하고 약속 시간 한 시간 전에 집을 나섰다. 이 정도면 걸어갈 수도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밤 시간대에 차를 타면 막히지 않고 센트럴까지 갈 수 있으리라는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걸어가는 게 빠를 정도로 차가 심각하게 막혔다. 중간에 내려서 우버를 부를까 싶었지만 옆에 버스가 아닌 차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할로윈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이 길을 거닐고 있었다. 코스타리카는 할로윈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게 길이 막히는 이유인지 뭔지 또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평소 빠르면 10분이면 갈 길을 한 시간을 꽉 채워 센트럴에 도착했다. 그렇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뒤 차를 타고, 에레디아와 알라후엘라의 정류장을 거쳐 투어 버스가 출발했다.


 이 모든 역경은 투어에 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미래의 내가 보내는 시그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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