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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더 Oct 29. 2024

EP073. 모르는 사람에게 길 물어보기

따뜻하지만 엄격한 프로페소라

2024.10.25. (금)


 금요일 아침 일주일 중 가장 좋아하는 그룹 운동 수업을 듣고 이어지는 필라테스 수업을 들을 거냐는 선생님 말씀에 오.. 음.. 네.. 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버렸다. 그렇게 혼자 남아서 1대1 수업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있으면 선생님 눈을 피해 좀 쉴 수 있는데 혼자 남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내일 여행을 가야 해서 너무 피곤한 몸을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하필 하체+코어 운동을 계속 돌리셔서 쉽지 않았다. 팔목이 아파요 좀 쉴게요는 해도 제가 코어가 거의 없어서 이런 동작은 허리나 목이 아프답니다!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


 운동 후 갑자기 본사의 담당자와 캐치업콜을 하게 되었다. 스페인어 선생님이 본인 상사에게 이야기해서 그분이 내 상사에게 다시 이야기를 전했다고 하는 것이 이곳 사무실 상사가 아니라 본사의 상사였나 보다. 다음 주에 계약과 관련하여 은행, 연구소와 미팅을 하게 되었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매 수업 전 어떻게 지내? 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여기까지 갑자기 일이 진행된 게 얼떨떨했다.


 주말에 여행을 가는 것에 관련해 투어사에 질문을 하는데 자꾸 오디오로 답장이 와서 못 알아듣겠다, 현장에 가서도 공지를 못 알아들을까 봐 걱정된다, 3시에 떠난다고 했는데 나 혼자 4시로 알아들어서 버스가 떠나면 어떻게 하냐 징징거리니 개인 번호를 알려주시면서 소통에 문제가 생기면 전화하라고 하셨다. 선생님 지금도 저랑 영어로 대화 안 해주시면서 주말에 전화하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주실 건가요? 그러나 이미 따뜻해진 마음.. 심지어 이 스페인어 사람들 자꾸 오디오로 답장 오는 게 힘들다고 하니까 왓츠앱에서 음성 메시지 대본 기능을 활성화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그러나 수업 끝나고 찾아보니 안드로이드 os에만 업데이트된 베타기능이었다.  


 프로페소라~그라씨아스~데 나다~하고 한 순간 훈훈하다가 어제 약간의 편법으로 과제를 해온 것을 괜히 솔직하게 말해서 바로 한 소리 들었다. 과제의 목적이 길거리에 나가 실제 상황에서 대화하는 것인데 아는 사람이랑 하면 어떻게 하니! 하셔서 한국에선.. 모르는 사람에게 말 안 겁니다. 그래서 쉽지 않습니다. 변명했다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아주 모두에게 말을 거니까 당장 길거리로 나가렴! 하셨다.


 흥 아르헨티나는 그런가 보죠.. 하면서 연구소를 나오는 길에 처음 보는 학생이 바쁘지 않다면 본인 선거 포스터를 붙이는 것을 도와달라고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본인이 하는 일을 설명하면서 수줍게 나에게 투표를 부탁했는데, 나는 옆구르기를 하면서 곁눈질로 봐도 투표권이 없게 생기지 않았나.. 아무튼 이것으로 이제 프로페소라의 말씀에 반박할 마지막 근거를 잃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잘 거는 편이었다.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입은 맥도날드 티셔츠가 귀엽길래 말을 걸었다가 전 팀원들에게 아직까지도 그때 그 이야기를 듣는다. (티셔츠 앞, 뒷면이 버거의 빵이고 내가 패티가 되는 그런 티셔츠였다. 참을 수 없다.) 이제 보니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부분이 아니라 스페인어로 말해야 하는 부분이 사람을 작게 만들었나 보다.


 도시락은 아침 운동 후 이미 까먹었기 때문에 점심은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서브웨이에서 먹었다. 그리고는 수요일에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찾으러 갔던 동네에서 발견한 카페에 다시 와봤다. 야외 자리가 예쁘기도 했고 또 리뷰에서 봤던 레몬 머랭 파이가 맛있어 보였던 것인데 막상 주문하니까 레몬 머랭 파이가 아직 오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커피를 먼저 받았는데 레몬 머랭 파이는 결국 오지 않았고 대신 추천해 주시는 다른 케이크를 먹었다. 요 며칠간 꺼내보지도 않고 괜히 가방 무겁게 들고만 다니던 데이터 책을 드디어 꺼내보았다. 몇 장이나 읽었을까,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연찮게 케이크를 다 먹은 시점이었다. 다리에 모기도 몇 방 물렸겠다, 책을 덮을 핑계가 너무 많았다. 명목은 데이터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었는데 결국 그런 건 다 없어지고 그냥 케이크를 먹고 싶었던 사람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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