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유림 ComfyForest Aug 15. 2021

설왕녀(雪王女)

브런치 작가와 함께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 눈의 여왕

첫 번째 이야기: 거울과 그 조각


안심하라! 곧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㝵人一道出生死: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나무아미타불.


저잣거리에서 고깔을 쓰고 호리병으로 박자를 맞춰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무애무(無㝵舞)를 추는 괴승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같이 춤도 추지만 어떤 이들은 침을 뱉고 욕을 한다.


그런 그를 등지고 몸을 숨기려는 듯 나무 뒤에 서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손에는 깨진 청동거울이 있었고 그 거울을 뒤로 비추어 괴승을 보고 있었다. 고깔을 쓰고 오색천과 방울이 달린 호리병을 흔들며 나아갔다 물러갔다 하는 그 모습이 깨진 청동거울에 일그러져 비치자 소년의 눈도 일그러졌다. 소년의 곁에 있던 소녀가 조심스럽게 소년의 얼굴을 쳐다봤다.


"방금 뭔가 내 가슴을 찔렀어. 눈에도 뭐가 들어간 것 같아."


그러자 소녀가 소년을 끌어당겼고 소년은 눈을 깜빡였지만 소녀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없어졌나 봐."


소년은 그렇게 말했지만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원망'이라는 날카로운 조각으로 그 조각은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모두 사소하고 흉측하게 바꿔놓으며, 심술궂고 사악한 것은 더욱 크게 만들고, 어떤 결점도 금세 보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원망'은 그날 소년의 심장과 눈 속에 깊이 박혔다.


소녀는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여느 때처럼 정원에서 햇볕을 쬐며 소년과 함께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송이가 몇 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눈송이 하나가 여성으로 변하는 듯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그녀는 너무나 섬세하고 얇아 수백만 개의 반짝이는 눈송이처럼 보이는 순백의 포(袍: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는 듯 투명하고 하얀 피부와 눈꽃이 내려앉은 듯 새하얀 머리카락, 두 눈은 마치 커다란 별처럼 빛났지만 평화롭거나 고요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소년은 정자 마루에서 뛰어내렸다. 바로 그때 커다란 새가 날아가듯 그녀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깨진 청동거울 한 조각이 남아 있었다.


거울을 주워 든 소년은 거울 뒷면에 새겨진 소성거사(小姓居士)라는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잣거리에서 괴승으로 유명한 그를 떠올렸고 오늘 소녀와 함께 몰래 지켜봤던 것이었다.


이제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보자!


두 번째 이야기: 소년과 소녀.


소년의 성은 설이었고 소녀의 성은 유였다. 설은 유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설은 무척 총명한 소년이었다. 유의 집에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어려운 책들까지 모두 읽고 기억해 뒀다가 유에게 들려주고는 했다.


유는 책을 읽는 것보다 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좋았다. 설은 마치 눈앞에 장면이 펼쳐지듯 생생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잣거리를 다녀온 후 설은 예전과 너무나 달라졌다. 더 이상 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않았고 유가 읽고 있는 책은 어린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옛 선인들의 지혜를 들려줄 때마다 설은 "그게 아니라"라고 하면서 말을 잘랐다. 설은 노는 것도 예전과는 다르게 유와 놀지 않고 혼자 어려운 책을 읽거나 다른 남자아이들과 싸움을 하거나 했다.


어느 겨울날, 눈송이가 날리고 있을 때 설은 썰매를 등에 메고 나타나더니 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안압지에 가서 썰매를 타야겠어."


설이 안압지에서 다른 남자아이들과 함께 한참 썰매를 타고 있는데 거대한 수레가 나타났다. 수레는 온통 새하얀 색이었고 수레를 모는 말도 흰색이었다. 설은 재빨리 수레에 자신의 조그마한 썰매를 연결했다. 그러자 수레는 안압지에서 벗어나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눈을 막기 위해 얼굴 앞으로 손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수레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묶었던 줄을 풀려고 했지만 수레가 너무 빨리 달리고 있어서 그조차 쉽지 않았다. 설은 겁에 질려 작은 썰매를 단단히 붙잡고 눈을 꼭 감았다.


한참을 달리던 수레가 우뚝 멈췄다. 그리고 수레에서 누군가가 내려서 설의 앞에 섰다. 눈처럼 새하얀 포를 입고 얼음으로 만들어진 듯 반짝거리는 관을 쓰고 눈꽃이 내려앉은 듯 새하얗고 긴 머리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의 눈부신 그녀는 바로 설왕녀였다.


"무사히 도착했다" 설왕녀가 말했다. "하지만 매우 추울 것이다. 수레로 가자. 그리고 내 포 안으로 들어오렴." 그녀는 설을 자신의 포로 감싸주었다. 설은 눈 속에 파묻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추우냐?" 설왕녀가 묻더니 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은 얼음보다 차가웠고 이미 절반쯤 얼어버린 그의 심장에 전해졌다. 설은 죽을 것 같이 추웠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설은 매우 편안해졌고 더 이상의 한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유와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일이 잘 생각나지 않게 되었다.


세 번째 이야기: 호랑이 할머니의 정원


설이 사라졌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무도 그 답을 알지 못했고 누구도 유에게 대답해 주지 못했다. 남자아이들은 설이 거대한 하얀색 수레에 자기 썰매를 매달고 어딘가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설이 어찌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린 유는 울고 또 울었다. 사람들은 설이 안압지나 다른 강에 얼음이 깨져 빠져 죽었을 거라고 했다. 참으로 길고 우울한 겨울의 나날이었다.


그러다 봄이 왔다.


"너희들 혹시 설이 어찌 되었는지 아니?" 유가 봄이 되어 처마 끝으로 찾아온 제비들에게 묻자 제비들은 지저귀며 대천이라는 강가로 날아갔다.


"역시 대천에 가 봐야겠어..."


이튿날 아침 일찍, 유는 집안사람들 몰래 꽃신을 신고 혼자 대천으로 걸어갔다.


"네가 내 친구를 데려간 게 정말이니? 그 애를 도로 데려다주면 내 꽃신을 줄게."


유는 강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유는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값진 물건, 꽃신을 벗어 강에 던졌다. 그러나 잔물결이 밀려와 꽃신을 다시 밀어냈다. 유는 꽃신을 멀리 던지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걱정되어 갈대숲에 있던 배에 올라갔다. 유는 배의 끄트머리에 서서 꽃신을 던졌고 유의 움직임에 매여있지 않던 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떠내려가는 꽃신을 바라보다 유가 정신을 차렸을 때 배는 이미 강기슭에서 멀어진 후였다. 유는 겁에 질려 울기 시작했지만 강가에서 날고 있던 제비 이외에는 아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제비들은 노랫소리로 유를 위로했다.


제비들의 소리에 유가 고개를 들어 보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강 양쪽은 예쁜 꽃들과 나무들로 아름다웠다. 


'어쩌면 강이 나를 설에게 데려다 줄지도 몰라.' 유는 이렇게 생각하며 금세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는 일어나 아름다운 초록 강둑을 계속 바라보았다. 한참 뒤 배는 커다란 수양버들이 있는 기슭에 멈췄다. 그곳에는 울타리가 높게 쳐져 있는 집이 한 채 보였다. 그런데 그 집 바깥에는 커다란 호랑이가 세 마리 버티고 서서 유를 보고 으르렁거렸다. 유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고 그러자 할머니 한 분이 울타리의 싸리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가엾어라. 어쩌다 혼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냐?" 할머니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지팡이 끝으로 배를 잡아 강가로 끌어당겨 유를 안아 올렸다. 유는 땅 위로 올라와 기쁘기는 했지만 여전히 으르렁거리는 세 마리의 호랑이를 보고 겁에 질려 할머니에게 매달렸다. 할머니는 호랑이들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큰 소리로 나무랐다.


"너희들은 하늘의 벌을 받아 누이동생을 대신 죽게 했으면서도 아직도 사람의 생명을 노리려 하느냐!"

그러자 세 마리 호랑이는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늘어뜨리고는 도망가버렸다.


"자, 이제 네가 누구인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이야기해 보려무나." 할머니가 말했다.


유는 그동안 일어난 일을 전부 말했고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유가 이야기를 마치고 할머니에게 설을 보았느냐고 묻자 할머니는 그 아이는 나타난 적은 없지만 조만간 유처럼 나타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내게도 너처럼 착하고 예쁜 딸이 있었는데 오라비들의 죄를 대신해 사랑하는 인간의 손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단다." 호랑이 할머니는 계속 말했다. "두고 보려무나. 우리는 같이 아주 잘 지낼 테니."


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할머니와 같이 지낼 수 없어요. 설을 찾으러 가야 해요."

할머니는 높다란 울타리의 싸리문을 열고 유에게 자신의 정원을 보여주었다. 정원에는 사과와 복숭아를 비롯한 온갖 과실나무들과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자, 일단 허기를 달래고 정원 구경도 하면서 찬찬히 생각해보거라."


유는 배가 고팠기 때문에 달콤한 복숭아를 정신없이 따 먹었다. 복숭아를 한입 한입 베어 물 때마다 유는 설에 대한 기억을 점점 잊게 되었다. 그 후 해가 뜨는 아침부터 해가 지는 밤까지 호랑이 할머니의 끝을 알 수 없는 정원에서 뛰어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는 정원 구석의 아름다운 꽃밭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화왕(花王)이라 불리는 모란꽃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역시 어여쁜 붉은 장미가 모란꽃을 향해 피어 있었다. 화려한 그 꽃들 아래에는 나지막한 키의 소박한 할미꽃 몇 송이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할미꽃이네요." 유가 할미꽃을 가만히 쓰다듬자 지켜보던 호랑이 할머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언제 씨앗이 날아와 꽃을 피웠을꼬."라고 말하며 뽑아버리려고 했다. 유는 깜짝 놀라 할머니를 막으며 말했다.


"안돼요! 예전에 설이 할미꽃은 약이 되는 매우 이로운 꽃이라고 했어요."


유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설이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호랑이 할머니가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할미꽃을 뽑아버리려 하자 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 화왕(花王)이 처음 신라에 왔을 때의 이야기래요. 향기로운 동산에서 푸른 장막으로 보호받으며 봄철이 되자 아름답게 피어나 온갖 꽃들 사이에서 홀로 빼어났대요. 그러자 가깝고 먼 데서 꽃의 정령들이 바삐 달려와 화왕을 알현하고자 했어요. 


이때 홀연히 붉은 얼굴과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예쁘게 차려입은 미인이 와서 말하기를 ‘저는 눈처럼 흰 물가의 모래를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에 목욕하여 때를 씻어내고, 맑은 바람을 쏘이면서 노닐었습니다. 이름은 장미라 합니다. 대왕의 밝은 덕망을 들어 옆에서 받들고자 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실는지요?’라고 말했어요. 


또 어떤 장부 하나가 베 옷에 가죽 띠를 매고 백발에다 지팡이를 짚은 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구부정하게 와서 말하기를 ‘저는 서울 바깥 큰 길가에 자리 잡아, 아래로는 넓고 아득한 광야를 내려다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빛에 의지해 살거니와 이름은 백두옹(白頭翁)이라 합니다.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며 의복이 장롱 속에 많이 있다 하더라도, 좋은 약으로 원기를 북돋우고 아픈 침으로는 병독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말에 이르기를, 좋은 베가 있다 해도 거적이나 삘기 같은 물건들을 버려서는 안 된다 하니, 무릇 모든 군자들은 인재가 부족할 때 대신 쓰이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왕께서도 역시 이러한 생각이 있으신지요?’라고 말했어요. 


이때 어떤 이가 ‘두 사람이 왔으니 누구를 받아들이고 누구를 버릴 것입니까?’라고 묻자, 화왕은 ‘장부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미인은 얻기 어려우니 이 일을 어찌할꼬?’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장부가 나와 말하기를 


‘저는 왕께서 총명하시어 이치를 아시리라 생각해서 왔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닙니다. 예부터 임금 된 사람들이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고 정직한 사람을 멀리 하니, 이 때문에 선인들이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고 낮은 관직에서 썩어 흰머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부터 이러했으니 전들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니, 화왕이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라고 했대요...”


이야기를 마친 유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맞아요! 설이에요! 나는 설을 찾으러 왔어요!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유는 다시 외쳤다. "설을 찾아야 하는데! 설은 죽었을까요?"


호랑이 할머니도 조용히 일어나 높다란 울타리의 싸리문을 활짝 열었다. 


"그 애는 죽지 않았단다. 하얗고 커다란 수레가 지나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 네 또래의 사내아이 냄새가 났었어. 천도복숭아를 먹고도 스스로 기억을 되찾았으니 이제 여기서 나와 같이 있을 수가 없겠구나. 대천을 따라가 보거라."


유는 세상을 향해 맨발로 달려 나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미 여름이 끝나고 늦가을이 되어 있었다. 계절을 알 수 없이 항상 따뜻하고 꽃들과 과실들로 가득한 정원에서 있었기에 유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유는 강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왔을 때 강가에 있던 수양버들의 잎들은 이미 노랗게 물들어 하나씩 땅에 떨어지고 있었고 갈대들도 피어서 그 씨앗들이 날리고 있었다. 너른 세상의 모든 것은 너무나 음울하고 황량해 보였다.


네 번째 이야기: 공주의 신랑


달리기를 멈추고 잠시 쉬는 유의 곁으로 커다란 까마귀가 총총총 뛰어왔다. 신기하게도 다리가 세 개였다. 까마귀는 한참 동안 거기 서서 유를 쳐다보고는 이따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침내 까마귀가 말했다. "까옥! 까옥! 안녕! 까옥!"


다리가 셋인 삼족오는 어린 소녀에게 친절하게 혼자 이 넓은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유는 까마귀에게 자신의 사연을 전부 이야기하고 설을 보았는지 물었다.


삼족오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가능한 일이야, 가능하고말고."


"뭐? 정말 그 애를 봤니?" 소녀가 외치면서 삼족오를 덥석 붙잡았다.

"잠깐만 진정해!" 삼족오가 말했다. "내가 그 애를 봤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건 그 애가 아주 조그마할 때일 거야."


"뭐? 조그마한 설을 봤다고?"


"응. 내 얘길 잘 들어봐." 삼족오가 말했다. "난 너의 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네가 까마귀 말을 알아듣는다면 훨씬 쉽게 설명할 수 있을 텐데."

"난 까마귀 말을 배운 적이 없어." 유가 말했다. "하지만 설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몰라. 미안해."

"괜찮아." 삼족오가 말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이야기해 줄게. 하지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구나." 그러고 나서 삼족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전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나라에는 유난히 똑똑해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려던 스님이 있었어.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당항성으로 가던 길에 날이 저물어 동굴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어둠 속에서 손에 닿는 그릇에 있던 물을 한 그릇 마셨대. 너무 달고 맛있어서 기분 좋게 잠들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물이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던 거야. 정신없이 마구 토하다가, '모든 것은 자기 마음에 있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대. 이후 그 스님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분이 낮은 농민이나 천민들과 어울려 함께 일하고 놀면서 불법을 전했어.


그런데 어느 날 스님이 아침부터 거리를 쏘다니며 큰 소리로 이런 노래를 불렀어.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련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어. 그때 왕께서 노래를 들으시고 무릎을 탁 치며 말했어. "스님께서 아마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자식을 낳으려 하시는 모양이구나. 그런 분의 자식이라면 영특할 것은 틀림없고, 나라에 훌륭한 인재가 생기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 


마땅한 배우자가 없을까 궁리하던 왕께서는 마침 남편을 잃고 궁에서 혼자 살고 있는 공주를 떠올렸대. 왕은 신하들을 시켜 스님을 궁으로 데려오게 했어. 신하들이 스님을 찾아 나섰을 때, 스님은 이미 일이 그렇게 될 줄 알고 먼저 문천교 다리에서 기다렸대. 저쪽에서 신하들이 보이자 스님은 모르는 척하고 다리를 건너다가 일부러 발을 헛디디고 물에 빠졌어. 신하들은 스님을 건져 내서 궁으로 데려갔어. 스님은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계를 대고 궁에서 머물렀대."


"잠깐만." 소녀가 말했다. "설의 이야기는 언제 해 줄 거야?"

삼족오가 말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들어봐. 나는 지금 온 힘을 다하고 있다니까." 이야기는 이어졌다.


"스님은 공주님과 궁에서 3일 간 머물렀어. 그리고는 다시 거리로 돌아갔어. 그때부터 스님은 스스로를 소성 거사라고 불렀대." 유가 소리쳤다. "소성 거사? 그건 설이 가지고 있던 청동거울 뒷면에 있던 글씨야!" 삼족오가 다시 말했다. 


"그래. 공주님은 열 달 뒤 자신의 이름 구슬처럼 예쁜 아기를 낳았어. 그리고 너무 기뻐서 아기를 안고 스님을 찾아갔대. 그런데 이미 스님은 보이지 않았어. 공주님은 너무 슬퍼하며 아기도 돌보지 않고 자지도, 먹지도 않고 울기만 했대. 소식을 듣고 왕께서 공주님을 찾아갔는데 공주님의 머리가 서리라도 내린 듯 희게 변해 있더래. 그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대." 유는 깜짝 놀라 물었다. "아가는? 아가는 어떻게 됐어?" 삼족오가 대답했다. "아기는 다른 아기가 태어난 집에서 젖을 얻어먹으며 컸대."


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그 아가가 설이니?" 삼족오는 대답했다. "그건 잘 모르겠어. 다만 그 후 공주님이 스님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내 친구에게 들었어." 유는 기뻐하며 물었다. "그럼 혹시 공주님이 설이를 데리고 스님이 있는 곳으로 갔을까?"


"글쎄. 거기까지는 모르겠어. 다만 그 이야기를 해 준 내 친구는 아주 멀리까지 날아갔었어." 대답을 한 후 삼족오는 유의 발을 보았다.


"저런. 네 신발은 어떻게 했니?" 삼족오가 묻자 유는 말했다. "설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강에게 주었어."

"그렇게 먼 곳까지 가려면 맨발로는 힘들어. 저기 산 위쪽 동굴에 반짝거리는 금은보화와 예쁜 옷과 두툼한 신발들이 있어. 내가 가져다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삼족오는 한참 후 두 발에는 꽃신 한 짝씩을. 나머지 한 발에는 모자를, 부리에는 따뜻해 보이는 포를 물고 돌아왔다.


"이건 내가 강에게 주었던 꽃신이야!" 유는 꽃신을 보고 기뻐하며 외쳤다. 그리고 옷깃이 금박으로 장식된 포를 입고 머리에는 모자를 썼다.


"이제 어디까지 든 갈 수 있겠구나."


유는 다시 한번 삼족오를 꼭 끌어안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안녕히! 안녕히!" 친절한 삼족오와 헤어지게 되자 유는 울고 있었고 삼족오도 눈물을 흘렸다. 유가 걷기 시작하자 삼족오는 나무 위로 날아올라가 유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검은 날개를 파닥거렸다.


다섯 번째 이야기: 도적 소녀


유가 어두운 숲을 가로질러 걷고 있자 갑자기 한 무리의 도적떼가 나타났다. 그들은 유의 금박으로 장식된 포를 보고는 "금이다! 금이야!"를 외치며 유를 붙잡았다.


"아니! 잠시만 기다려봐! 이건 어디서 많이 보던 옷인데? 모자도! 꽃신도!"


도적떼 무리에서 사납지만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저건 내 거야! 내가 아끼던 옷과 모자와 신발이라고!"


여자아이는 유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너 이 옷과 모자와 신발, 어디에서 훔친 거야!" 유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강가에서 친절한 까마귀가 가져다줬어." 여자아이가 다시 외쳤다. "뭐라고? 혹시 다리가 세 개인 까마귀 녀석이야?" 유는 다시 대답했다. "맞아. 다리가 세 개였어." 


"그 건방진 까마귀 녀석이 맞네! 요즘 물건들이 사라진다 했더니!" 덩치가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험상궂게 생긴 도적이 말했다. "이 애는 너무 작아서 쓸모도 없겠다. 저 애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빼앗고 절벽에 던져버려!" 도적떼들이 유에게 덤벼드는데 명령을 내렸던 험상궂게 생긴 도적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얏!" 아까 그 사납지만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도적의 등으로 펄쩍 뛰어올라 그의 귀를 물어뜯은 것이었다.


"이 못된 것이!" 도적이 외치자 여자아이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저 애는 나랑 놀 거야! 그리고 내 옆에서 자야 해!" 여자아이는 다시 한번 그의 귀를 세게 물어뜯었고 덩치 큰 도적은 펄쩍펄쩍 뛰었다. 다른 도적들은 늘 봐 왔던 듯 모두 웃기 시작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늘도 춤을 추는구먼."


나무둥치와 덤불을 넘어 숲 속 깊숙이 들어가자 동굴이 나타났다. 삼족오가 말한 그 동굴 같았다. 도적 소녀는 유보다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어깨가 넓고 힘은 훨씬 셌다. 소녀는 유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우리가 사이좋게 지내기만 한다면 너를 절벽에 던지지 못하게 할 거야. 그런데 너는 혼자 어디를 가는 길이었니?'


유는 도둑 소녀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과 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도둑 소녀는 굳은 표정으로 유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꽃신이 본래 네 것이었다니 네게 줄게. 대신 그 설이라는 녀석은 잊어버려!"


도적들은 동굴 한가운데 커다란 모닥불을 피우고 사냥해 온 멧돼지를 굽고 있었다. 아까 그 덩치 큰 도적 두목이 물었다.


"넌 왜 혼자서 이 숲을 지나고 있었던 게냐?" 도적 소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무슨 상관이야! 오늘부터 나랑 같이 지낼 텐데." 유는 대답했다. "나는 너와 같이 지낼 수 없어. 설을 찾으러 가야 해."


도적 소녀가 다시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두목이 그녀의 입에 큼지막한 고기 덩어리를 집어넣어 입을 막고 다시 물었다. "설? 설이 누구냐?" 유는 대답했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내 친구예요."


"뭐라고?" 도적떼들은 와~! 하고 웃었다. 도적 소녀도 입 안 가득 고기를 문 채 끅끅거리고 웃었다. "정말이에요. 세상의 모든 이치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어요."


"그래?" 두목이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산속에는 우리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안 해 줬나 보구나." 유는 대답했다. "들은 적이 있어요." 두목은 재미있다는 듯 몸을 앞으로 내밀어 유에게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이야기해 보려무나."


유는 설이 해 준 이야기를 열심히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는 영재 스님이라는 분이 계신대요. 익살스러운 성격에다 욕심도 없고 향가도 잘 불렀는데 남은 생애를 남악(지리산)에서 지내려고 길을 떠났어요. 그런데 대현령에 이르러 60명이 넘는 도적들과 만났어요. 도적들은 스님께 시퍼런 칼을 들이대며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영재 스님은 칼날 앞에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길을 막으니 아예 드러누워 노래를 하더래요.


도적들이 이상히 여겨 물었어요. '할아버지 누군교?' 스님이 대답했어요. '난 영재다.' 도적들도 평소 유명한 그 이름을 들었기에 '그럼 향가나 한 곡 불러보소.'라고 했어요. '서동요를 부를까, 혜성가를 부를까?' 하니 '이왕 부를 거 우리를 위해 지어서 불러주소.'라고 하자 스님은 '좋다. 그럼 한번 들어들 보거라.'라고 하시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제 마음의/ 참모습을 모르던 날/ 멀리 서산으로 지나치고/ 숨어서 가고 있네/ 오직 그릇된 도적들을 만나/ 두려움으로 다시 또 돌아가겠는가/ 이 칼날을 지나면/ 좋은 날이 올 것을/ 아아 이 정도 선업으로는/ 새 집에 들지 못하리니.'


도적들이 듣고 보니 과연 그럴듯해 감사의 뜻으로 비단 두 필을 드리자 스님이 말했어요. '이 재물이 지옥으로 가는 죄악이라. 난 지금 아무것도 없는 산중으로 가서 여생을 보내려는데 어찌 이런 걸 받겠는가.' 하고 비단을 내던졌어요. 그러자 도적들은 더욱 감동해 들고 있던 칼과 창을 버리고, 머리 깎고 영재 스님의 제자가 되기로 한 거예요. 그리고는 스님과 같이 지리산에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요."


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적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도적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는 거야?" 유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도적 소녀가 다시 말했다. "그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는 도적들이니까."


"하지만... 너와 아저씨들은 날 살려줬는걸. 그리고 이렇게 먹을 것도 나눠줬고..." 유가 말하자 도적 소녀는 뺨을 살짝 붉게 물들였고 다른 도적들은 "맞아! 맞아! 그렇고 말고!"라고 외치고는 다시 왁자하니 떠들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자 도적들은 한 사람 두 사람 모닥불 주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유도 앉은 채로 끄덕끄덕 졸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유의 팔을 잡아당겼다. "쉿!" 도적 소녀였다.


"이쪽으로 와." 도적 소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자 커다란 나무 아래에 우리가 있었다. 그 안에는 새하얗고 커다란 사슴이 꼿꼿하게 선 채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덫에 걸려서 잡힌 놈이야. 그런데 흰 사슴은 산신들이 아끼는 상서로운 동물이라고 잡아먹지도 못 하고 이렇게 우리에 가둬놓고 있었어."


"가엾어라..." 유는 사슴에게 다가갔다. "네 고향이 어디니? 혹시 눈처럼 흰 공주님과 설이라는 아이를 본 적이 있니?" 사슴이 대답했다. "아니. 본 적 없어. 하지만 나를 여기서 꺼내 준다면 분명히 산신님들께서 찾는 것을 도와주실 거야."


"거짓말하는 것 아니겠지?" 도적 소녀가 윽박지르듯 말했다. "거짓말을 하면 널 불에 구워 먹어버릴 거야." 사슴이 대답했다. "흰 사슴은 거짓말을 못 해. 거짓을 말하면 산신님들의 보호를 받을 수 없어." 


"그래?" 도적 소녀는 무거운 우리의 문을 열었다. "넌 자유야. 대신 약속해. 이 아이를 산신님들께 데리고 가서 설이라는 아이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 그리고 도적 소녀는 유의 사연을 사슴에게 전부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사슴은 커다란 눈으로 도적 소녀와 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약속할게. 흰 사슴은 꼭 약속을 지킬 거야."


도적 소녀는 유가 자신의 등을 밟고 사슴 위로 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사슴 위에서 유는 도적 소녀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설을 찾으면 다시 만나러 올게." 도적 소녀가 대답했다. "아니, 이곳으로는 다시는 오지 마. 대신 내가 너를 만나러 갈게." 작별인사를 마치자마자 도적 소녀는 흰 사슴의 엉덩이를 세게 때렸다. "잘 가! 너도 두 번 다시 사람들에게 잡히지 마! 안녕! 안녕!"


도적 소녀는 흰 사슴의 하얀 꼬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겨울 매서운 바람 속에서 이를 악 물고 주먹을 꼭 쥔 채 언젠가 산 아래 넓은 세상으로 내려가리라 다짐했다.



여섯 번째 이야기: 세 여인


흰 사슴은 유를 태운 채 바람처럼 달리고 달려 어느 고개에 다다랐다. 고개 위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웬 여인이 나타나 유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곳은 인간이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유는 한겨울 바람에 뼛속까지 얼어붙어 입도 열지 못했다. 사슴이 대신 유의 사연을 모두 전했다. 그러자 여인은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하고는 걷는 것도 아니고 나는 것도 아닌 땅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여 앞장서서 나아갔다. 사슴은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한참을 가자 커다란 폭포가 나타났는데 여인은 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사슴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폭포 뒤편에는 큰 동굴이 있었고 그 동굴을 지나자 다시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그 초원의 한가운데는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고 두 여인이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앉아있던 여인 중 한 명이 말했다. "인간을 쫓으러 가셨으면서 어째서 인간을 데리고 오셨습니까?" 첫 번째 여인이 말했다. "혈례님.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사정이 있습니다." 혈례라 불린 여인이 다시 물었다."어떤 사정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내림님." 내림이라 불린 여인이 다시 답했다. "호국 신으로 해야 할 일이 생긴 듯합니다." 내림은 유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내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세 곳의 호국 신이다."


흰 사슴은 얼른 네 다리를 꿇어 세 여신들에게 예를 표했고 유도 사슴을 따라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소상히 이야기해 보거라."


유는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들과 설이 얼마나 똑똑하고 좋은 친구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 여신은 차분히 듣고는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림님. 인간사에 함부로 관여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혈례님. 설은 이 나라에서 앞으로 중요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여신이 입을 열었다. "실은 지난겨울, 골 화천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던 흰 수레를 봤습니다. 얼음처럼 차갑게 변한 공주가 설을 데려가고 있었습니다."


흰 사슴이 말했다. "현명하고 강한 여신님들. 이 소녀가 얼음같이 변한 공주에게서 설을 데려올 수 있게 힘을 주실 수 없으신가요?" 사슴은 세 여신들에게 어린 유를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유도 눈물을 글썽이며 마찬가지로 애원했다. 세 여신은 잠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사슴만 한쪽으로 끌고 갔다. 


"모두 사실이구나. 설은 자신의 어머니이자 어머니가 아닌 존재와 같이 있는데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고 이상적이라 생각하고 있어." 사슴이 물었다. "그럼 유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설을 데려올 수 있는 힘을 주실 수는 없나요?"

"이미 갖고 있는 힘보다 더 큰 힘을 줄 순 없어. 저 애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니? 인간들과 동물들이 모두 저 애를 돕고 싶어 하는 걸 보렴. 하지만 저 애에게 그 힘에 대해 말하면 안 된단다. 저 애의 힘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어서 스스로 깨달아야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단다. 저 애를 소요산에 데려가 붉은 산수유 열매가 가득 달린 커다란 덤불 위 눈 속에 내려놓아라. 하지만 너는 거기서 바로 돌아와야 한다. 네가 거기에 같이 있으면 저 아이는 자신의 힘을 깨달을 수 없어."


세 여신은 다시 유가 있는 곳으로 흰 사슴을 데려와서 유를 사슴 위로 둥실 태워주었다. 그리고는 하얀 소금을 한 자루 유에게 주었다. "가져가거라. 도움이 될 것이다." 사슴은 그대로 있는 힘껏 빨리 달렸다. 소요산 붉은 산수유 열매가 가득 달린 커다란 덤불에 닿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유를 내려놓고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유가 눈물을 닦아주려고 다가가자 사슴은 최대한 빨리 달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유는 차가운 눈 속에 잠시 동그마니 서 있다가 있는 힘껏 앞으로 달렸다. 


유를 향해 엄청난 눈보라가 불어 닥쳤다. 눈송이들은 살아 있었고 유를 공격하는 듯했다. 유는 자신을 공격하는 눈송이들을 향해 외쳤다. "나는 너희들과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야. 난 그저 내 친구 설이와 만나고 싶을 뿐이야." 그러나 눈송이들은 더욱 격렬하게 유를 공격해 유가 마시고 내뱉는 숨결까지 모두 얼려버렸다. 유는 괴로워하다 쓰러졌고 쥐고 있던 소금자루를 놓쳤다. 자루에서 소금이 흩어져 나오자 눈송이들은 주춤하며 물러나 유는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유는 쥐고 있던 소금 자루를 덤불 속으로 던져버렸다. "이것 봐. 나는 너희들과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야. 그러니 제발 날 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렴."


거센 눈보라는 잦아들고 포근한 함박눈으로 변했다. 그리고 유의 눈앞에 하얀 얼음 궁이 나타났다. 


일곱 번째 이야기: 설 왕녀의 궁과 그 밖의 장소에서 일어난 일


궁은 눈보라로 지은 것이었고 문은 살이 에는 듯 한 찬바람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설은 추위에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설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설왕녀가 입을 맞추어 이미 심장은 얼음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은 설왕녀와 얼음으로 만든 주령구로 같이 놀거나 혹은 주위를 뛰어다니며 날카롭고 납작한 얼음 조각들을 움직여 칠교 맞추기 놀이를 했다.


설은 얼음조각들로 정교한 모양을 만들며 무엇인가를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의 얼음 조각을 맞추는 것이었다. 설은 얼음조각들을 배열해 글자들을 만들 수 있었지만 정말로 원하는 단 하나의 글자를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그 단어는 바로 영원 영(永) 자였다. 설왕녀가 설에게 말했었다. "그것을 맞출 수 있다면 너는 너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고 나는 네게 온 세상을 주겠다." 하지만 설은 그것을 맞출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영(永) 자는 얼음 빙(氷) 자가 될 뿐이었다.


 "이제 나는 따뜻한 곳에 잠시 다녀오마." 설왕녀가 말했다. "검은 솥을 한번 살펴보고 와야겠다." 탐라에 있는 화산을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 얼음칠을 한번 해 줘야 해. 그래야 감귤에 좋을 테니.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석빙고에 들러 얼음이 좀 더 잘 얼도록 해야겠다." 그러더니 설왕녀는 텅 빈 넓은 얼음 방에 설을 혼자 남겨놓고 날아가버렸다. 설은 얼음 조각 맞추기를 계속했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해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설은 너무나 오래도록 조용히, 그대로 앉아 있어서 마치 얼음으로 만든 조각 같았다.


바로 그때 유가 거센 바람으로 만들어진 문을 지나 궁으로 들어왔다. 유가 들어오자 바람이 마치 잠들듯 잦아들기 시작했다. 유는 넓은 얼음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설을 알아보았다. 유는 양팔로 설을 꼭 껴안고 외쳤다. "설! 내 친구 설! 마침내 찾았어!"


하지만 설은 빳빳하고 차갑게 굳은 채 앉아 있었다. 유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그것이 설의 가슴에 떨어지자 곧장 심장으로 들어가 얼음 덩어리를 녹였다. 심장에 따스한 피가 돌자 설은 유를 알아보고 외쳤다. "유! 그동안 어디 있었니?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설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긴 너무 춥다! 너무 넓고 아무것도 없어!" 설은 유를 꼭 안았고 유는 기쁨의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렸다. 유의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자 얼음 조각들이 녹으며 스스로 움직였고 마침내 설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온 세상을 얻으려면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던 바로 그 글자의 모양을 만들었다.


글자가 완성되자마자 설왕녀가 무언가에 의해 빨려 들어온 듯 얼음방 안으로 소환되어 왔다. 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머니! 글자가 맞춰졌어요!"


설왕녀는 그대로 멈춰 선 채 글자를 주시했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에서 얼음조각들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얼음조각들은 반투명해지더니 눈물로 변했다. 그러자 찬바람으로 만들어진 문이 사라지고 눈보라가 멎으며 궁 안의 얼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머니?"

설왕녀가 미동도 하지 않자 설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설의 손이 닿자 그녀의 손에는 온기가 깃들었다. 설은 따뜻해지는 설왕녀의 손을 느끼고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어머니! 저예요! 총이에요!"


설왕녀의 전신이 따스해지면서 머리칼에는 밤하늘 같은 검은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팔을 뻗어 설을 꼭 끌어안았다.


"내 아들... 나의 원망이 너까지 차갑게 얼려버렸었구나. 정말 미안하다." 설왕녀가 온기를 되찾자 얼음 궁은 어느새 작지만 포근해 보이는 초막으로 변했다.


유는 어리둥절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왕녀, 아니 이제 온전히 설의 어머니가 된 공주는 유에게 다가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고맙구나. 우리 모자의 눈과 심장에 박혀 있던 '원망'을 너의 순수하게 다른 이를 위하는 온전한 마음으로 녹여주었다."


"어머니, 이제 우리와 같이 가요." 설의 말에 공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나는 이곳에서 어린 네게 지은 죄를 속죄해야 한다." 그녀는 눈보라가 사라지자 바로 저 너머로 보이는 암자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당신을 원망하고 미워해 어린 자식에게까지 그 원망과 미움을 안긴 저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암자 쪽에서 오색구름이 일더니 그들 앞으로 날아와 설과 유를 감쌌다. 그리고는 둥실 그들을 들어 올려 그대로 천천히 날기 시작했다. "앗! 어머니!" 설이 공중에서 공주를 향해 외치자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오색구름 안에서는 우렁우렁 묵직하지만 부드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다시 만날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말거라."


오색구름을 탄 두 아이는, 아니 여정을 겪는 동안 어른이 됐을지 모르는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이미 눈치챈 여러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사바하(좋은 일이 있겠구나, 좋은 일이 있겠구나, 대단히 좋은 일이 있겠구나, 지극히 좋은 일이 있겠구나)!


*그림은 작가 흑요석님의 그림입니다.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자삭하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세계유산? 작품들로 가 보자 Part1 내가 가 본 곳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