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놀이'다
공부는 '놀이'다
공부를 '공부'로, 혹은 일을 '일'로만 받아들이면, 오래 견뎌낼 수 있을까? '공부'나 '일'은 재미가 없다. 재미없는 걸 평생하고 살아야 한다니 엄청난 곤혹 아닌가? 공부를 '놀이'로 받아들여라. 재미있게 하는 거다. 공부를 재미로 받아들여 즐기기 시작하면, 그 결과물에 어떤 무엇보다 큰 뿌듯함과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내가 공부를 지속하는 하나의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그 결과물들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 자신을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마치 '아 쟤 전교 1등'과 같은 타이틀을 만들어주고, 그 재미에 가속도를 한층 더해준다. 그 재미에 가속도가 더해지면, 그 분량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나게 되고, 이는 그 분야의 '전문성'으로 이어진다. 전문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곧 그 결과물들로 경제활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은 재미있는 '놀이'가 나를 먹여 살리는 '일'이 된다. 이는 나를 돈에만 얽매여 직장을 정하는 나에서 돈을 따라오게 만드는 나로 바꾸게 만든다. 이는 먹고살고자 한다면 평생 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공부를 그저 공부로만 여길 것인가? 공부를 놀이로 여기고, 평생 그 재미를 즐겨라.
새로운 관점
abide라는 단어는, 고등학생 수준의 어휘에서 전치사 by와 함께 '~을 준수하다'라는 의미로 출현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수능 영어에 갇혀 다른 영어를 접하지 않게 되면, abide라는 단어가 '머무르다, 견디다'와 같은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체 살아갈 것이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읽고 있다면 그 순간 마치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이 이해가 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후에 다시 보고, 듣고, 읽어본다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관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래서이지 않을까. 새로운 관점을 얻기 위해.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참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친구이기에 오랜만에 보더라도 얼마 전에 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부담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할 수 있다. 친구와는 참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다. 그 이야기들 속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고, 별 의미가 없는 대화가 있기도 하다. 친구와 오랜 기간 만나왔지만, 과거에 친구를 만났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친구를 만났을 때는 그래도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대화 속의 여유이다. 과거의 나는 서툴렀다. 잘 몰랐고, 내가 아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고, 그걸 친구에게 권하기도 했다. 이제는 아니다. 공부했기에 알 수 있다. 친구는 나랑 다른 존재이고,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고, 내가 하는 것들이 친구에겐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일까?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