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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립협회와 프랑스 살롱의 갈림길

by 이정봉 변호사

1. 코드화된 인간본성


인간 본성의 결함은 유전자로 코드화 되어 있습니다. 역사이래 반복적으로 발현되어 왔습니다.


“인류는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동일하기 때문에, 역사는 우리에게 새롭거나 이상한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역사의 주요 용도는 인간 본성의 불변하고 보편적인 원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 데이비드 흄


과거의 경험 데이터(역사, 문화, 철학, 종교, 법, 도덕, 기술, 정치, 경제)는 사람의 뇌속에 학습되어도 후대사람에게 코드화되어 자연발화하지 않기에, 세대를 이어 학습되고, 계승되어야 합니다.

몸 밖의 연결이자, 관계를 통한 전승이라는 체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본성은 쉽지만 이유를 모르고, 지혜는 어렵지만 그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트워크 체계를 통해 전승되는 지혜의 힘이, 몸 안에 코드화된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의 힘에 밀려나는 전지구적 ‘형세’에 있습니다.


우려의 마음이 앞섭니다. 다시 ’오래된 미래‘와 ’온고지신‘을 가슴 속에 되새길 수 있기를 소망하며, 그 지혜의 힘을 공부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2.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지혜의 국가적 채택 - 영국 왕립협회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설립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7세기 영국의 과학적, 사회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645년경, 런던과 옥스퍼드의 자연철학자들은 비공식적인 모임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대학(Invisible College)'이라 불렸는데, 이는 그들이 공식적인 기관 없이 순수하게 지적 호기심으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이 모임에서 과학자들은 실험 결과를 공유하고 새로운 발견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1660년 11월 28일, 이 비공식 모임이 보다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크리스토퍼 렌, 로버트 보일과 같은 12명의 과학자들이 그레샴 대학에 모여 정기적인 과학 토론회를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왕립학회의 시작이었습니다.


1662년, 찰스 2세가 이 모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왕립학회'라는 명칭이 부여되었습니다. 왕실의 공인은 단순한 명예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는 과학 연구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었습니다.


왕립학회의 설립은 과학 발전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첫째, 실험적 방법을 강조했습니다. "Nullius in verba"(어떤 사람의 말도 맹신하지 말라)라는 학회의 모토는 실험을 통한 검증을 중시하는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둘째, 과학적 발견의 공유와 토론 문화를 확립했습니다. 1665년부터 발행된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는 세계 최초의 과학 저널로, 과학자들 간의 지식 공유를 촉진했습니다.


셋째, 과학 연구의 제도화를 이끌었습니다. 정기적인 모임, 체계적인 기록, peer review 시스템 등은 현대 과학 연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왕립학회의 설립은 단순히 하나의 기관이 만들어진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중세의 신학적, 철학적 전통에서 벗어나 실증적이고 실험적인 근대 과학이 태동하는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3. 찰스 2세는 왜 왕립협회를 공인했을까요?


찰스 2세는 1660년 왕정복고를 통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아버지인 찰스 1세의 처형이후, 내전과 크롬웰의 공화정 시기를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보냈습니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발달된 과학 문화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특히 파리의 살롱 문화에서 과학적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고, 그가 과학의 가치를 인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왕정이 복고된 후, 찰스 2세는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과학은 매우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과학적 발전은 국가의 번영과 직결되었고, 왕의 현명한 통치를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항해술과 지도 제작의 발전은 해상 무역과 해군력 강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찰스 2세의 과학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도 컸습니다. 그는 화학 실험실을 가지고 있었으며, 과학시연을 직접 관람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항해와 관련된 과학성과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영국이 해상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왕립학회의 초기 회원들도 현명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면서도, 과학 발전이 왕국의 번영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설득했습니다. 로버트 훅이나 크리스토퍼 렌과 같은 과학자들의 실용적인 연구 성과는 이러한 주장에 설득력을 더했습니다.


찰스 2세의 왕립학회 공인은 왕실의 권위를 과학 발전과 연결시키는 동시에, 과학 연구에 제도적 기반을 제공하는 상호 이익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 과학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4. 프랑스 살롱문화는 어떠했을까요?


파리의 살롱 문화는 17세기 초반부터 18세기를 거쳐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번성했던 독특한 지적 문화 현상입니다.


살롱 문화의 시작은 귀족 여성들의 사교 모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특히 랑부이에 후작부인(Marquise de Rambouillet)이 1610년경부터 자신의 저택에서 주최한 모임이 최초의 살롱으로 여겨집니다. 그녀는 당시 궁정 문화의 조악함에 실망하여, 보다 세련되고 지적인 모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살롱이 과학적 토론의 장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데카르트의 영향이 컸습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 현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식을 제시했습니다. 살롱에서 과학적 주제가 논의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리 테레즈 로데(Marie Thérèse Rodet)의 살롱은 과학적 토론이 특히 활발했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녀의 살롱에는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들이 모여 당대의 최신 과학적 발견들을 토론했습니다. 뉴턴의 이론이 프랑스에 전파된 것도 이러한 살롱을 통해서였습니다.


살롱이 과학적 토론의 장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들 때문입니다. 첫째, 살롱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토론을 허용했습니다. 대학이나 교회와 달리, 살롱에서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이론들도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살롱은 계층 간의 교류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귀족과 부르주아,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만남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교환을 촉진했습니다.


셋째, 살롱은 과학적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어려운 과학적 개념들이 세련된 대화의 형식으로 전달되면서, 과학은 특별한 전문가들만의 영역이 아닌 교양 있는 시민들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살롱 문화는 프랑스 계몽주의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 프로젝트도 살롱에서의 토론을 통해 구체화되었다고 합니다.


파리의 살롱은 단순한 사교의 장을 넘어, 근대 과학의 발전과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한 문화적 제도였습니다.



5. 프랑스 살롱문화와 영국 왕립협회의 갈림길


같은 시기에 과학 발전을 이룬 두 나라가 왜 다른 길을 걸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두 나라의 사회구조적 차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살롱 문화를 통해 새로운 과학적, 철학적 사고가 확산되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기존 체제의 모순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계몽사상이 살롱을 통해 전파되면서, 특권층과 일반 시민 사이의 불평등이 더욱 두드러지게 인식되었습니다.


프랑스의 구체제(Ancien Régime)는 매우 경직된 신분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인구의 2%에 불과했지만 거의 모든 특권을 독점했고, 세금도 내지 않았습니다. 반면 제3신분은 인구의 98%를 차지했지만 과중한 세금 부담을 져야 했습니다. 더구나 새롭게 부상한 부르주아지(도시 상공인층)는 경제력은 있었지만 정치적 발언권은 전혀 없었습니다.


영국과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국은 명예혁명(1688년) 이후 입헌군주제가 정착되었고, 의회를 통해 신흥 상공인층의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반영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영국의 귀족들은 상업과 산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와의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일치했습니다.


반면, 프랑스의 귀족들은 상업활동을 신분에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겼고, 토지에서 나오는 지대수입에만 의존했습니다. 이는 경제발전을 저해했을 뿐만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살롱 문화는 이러한 모순을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살롱에서는 계몽사상가들의 평등 사상과 자유 사상이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이는 특권층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형성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볼테르, 루소, 디드로와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이 살롱을 통해 확산되면서, 기존 체제의 부조리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습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는 재정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습니다. 영국의 경우 의회를 통해 증세나 국채발행 같은 재정정책을 결정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그러한 제도적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결국 루이 16세가 삼부회를 소집하면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에서 과학과 계몽사상이 발전했음에도 혁명으로 이어진 것은, 이러한 지적 발전이 오히려 기존 체제의 모순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살롱은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장이었지만, 동시에 그 사상이 현실과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창구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6. 영국의 TOPDOWN, 프랑스의 BOTTOMUP - 근대화 과정의 본질적 차이


영국의 경우, 찰스 2세는 과학 발전을 왕권 강화와 국가 발전의 도구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왕립학회의 공인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상징하는 사례였습니다. 이는 영국 왕실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고,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정치 체제 안으로 통합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반면, 프랑스의 살롱 문화는 아래로부터 형성된 지적 공간이었습니다. 비록 귀족들의 저택에서 시작되었지만, 공식적인 정치 체제 밖에서 발전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왕실이 새로운 지적 흐름을 제도권 내로 수용하는 데 실패했음을 의미합니다. 루이 14세나 루이 15세는 살롱에서 논의되는 새로운 사상들을 정치 체제 안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경계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두 나라의 서로 다른 정치적 진화 경로를 만들어냈습니다. 영국에서는 과학과 이성이 정치 체제의 일부가 되어 점진적인 개혁을 가능하게 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사상이 기존 체제와 대립하면서 결국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기존 체제가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그 사회의 변화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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