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작.썰(판결문 작화 썰풀이) 2
침해의 '현재성'은 어디에서 멈추는가?
'정당방위' 행위의 시간적 한계를 재해석하다.
- 대법원 2023. 4. 27. 선고 2020도6874호 판결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공장 한 귀퉁이,
사람의 온기 대신 기계 소리만이 익숙했던 포장부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사용자 A가 칼날 같은 결정을 내리면서부터였다.
일하던 사람들을 낯선 영업부로 밀어내고, 그 빈자리를 차가운 외주화로 메우려 하자, 밥줄을 잡고 선 근로자들의 가슴에는 응어리가 맺히고 불신의 골은 깊어만 갔다.
갈등은 마침내 살과 살이 부딪히는 격한 몸짓으로 터져 나왔다. 전환배치에 항의하는 근로자 B의 메마른 어깨를 A의 손이 거칠게 밀쳤다.
찰나의 순간, 뒤엉킨 두 몸뚱이는 시멘트 바닥으로 함께 곤두박질쳤고, A는 넘어진 B의 몸 위에 올라탄 형국이 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또 다른 근로자 C의 눈에는 동료의 위태로움만이 가득 차 올랐다.
그는 본능처럼 A의 어깨 쪽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다른 이가 A를 일으켜 세우자, C는 잡았던 옷에 힘을 실어 흔들었다.
A에 대한 분노차원의 공격이었을까, 혹은 위협을 막으려는 다급한 몸짓이었을까.
세상 법은 C의 A에 대한 이 행위를 '폭행'이라 이름 붙였다.
C는 법의 심판대 위에 섰다.
쟁점은 하나였다.
C가 A의 옷을 잡고 흔들었을 때, A가 B를 밀어 넘어뜨린 '부당한 침해'는 이미 A 자신도 넘어짐으로써 끝난 것이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C의 행위는 방어의 때를 놓친, 그저 뒤늦은 분풀이에 불과한 것인가?
법은 말한다. 현재의 부당한 침해로부터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을 방위하기 위하여 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형법 제21조 제1항 : 정당방위).
1심과 2심 법원은 C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비록 벌금 삼십만 원의 선고유예라는 가벼운 형벌이었으나, 그 관점에서는 A가 넘어진 순간 침해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된 것이었다. '현재의 침해'로 볼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C는 물러서지 않고 대법원의 문을 두드렸다. 최고 법정은, 하급심의 판단을 뒤집는 묵직한 목소리를 내놓았다.
"침해의 현재성이란, 침해 행위가 형식적으로 '기수'에 이르렀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침해상황이 종료되기 전까지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일련의 연속되는 행위로 인해 침해상황이 중단되지 아니하거나 일시 중단되더라도 추가 침해가 곧바로 발생할 객관적인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그중 일부 행위가 범죄의 기수에 이르렀더라도 전체적으로 침해상황이 종료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법원의 이 판결은, 그간 굳어 있던 '현재성'이라는 법의 문턱을 스스로 허물고 나아간 발걸음으로 읽힌다.
본디 '정당방위'란 위법한 행위를 예외적으로 용인하는 것이기에, 법원은 그 문을 좁게 열어두려는 경향이 짙었다.
특히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처럼 질기고 상습적인 가해 앞에서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폭력이 아니면 방어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었다.
'침해의 현재성'에 대한 좁은 해석은 일상적이고 상습적인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피해자의 절절한 몸부림을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판결은 묻는다. 침해의 '현재'는 누구의 시계(時計)로 재어야 하는가? 공격을 가하는 자의 행위가 멈춘 순간인가, 아니면 그 공격으로 인해 위협 아래 놓인 방어자의 '불안'이 가시지 않은 순간까지인가.
대법원은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침해 상황의 종료는 방어하는 자, 즉 피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선언이다.
법은 서류 속 문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숨 쉬고 고통받는 인간의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정당방위는 단순히 날아오는 주먹을 막는 수동적인 몸짓에 그치지 않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때로는 위협에 맞서 적극적으로 반격하는 것 또한 방어의 한 형태일 수 있다(대법원 89도358 판결 등).
대법원은 C의 행위가 겉보기에는 침해의 현재성이 종료된 A에 대한 부당한 공격처럼 보일지라도, B를 보호하고 추가적인 위협을 막으려는 일련의 방어 행위 속에 놓인 것이라면, 함부로 그 정당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판결의 숨결은 차가운 법조문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절박함과 상황의 맥락을 읽어내려는 법의 고뇌와 함께 한다.
형식 논리의 틀을 넘어,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이의 시선으로 '현재'를 재단하려는 관점은, 앞으로 수많은 갈등의 현장에서 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될 것이다.
그 공장의 그늘 아래서 움켜쥔 옷자락 하나에 담긴 의미를, 법은 비로소 헤아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