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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음을 쌓다'

- 지적 호기심의 미학

by 이정봉 변호사

1. '말'이라는 전승의 도구


사람이 태어나 경험한 데이터와 이를 통한 깨달음, '지혜'는 자연스럽게 유전되지 않습니다. 전승, 승계라는 몸 밖의 체계를 통해서만이 끊김없이 이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최초, '말'이 그 전승의 도구로서 기능했습니다. 중요한 것들이 입과 입을 통해 이어져 나갔습니다. 말의 내용을 기억하는 행위가 중요했고, '오래 산자들의 입'은 중요한 전승의 도구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그 기원의 신화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말이 전승되기 위해서는 흥미와 관심을 끄는 '스토리'가 필요했습니다. 뇌 속 편도체에 각인되기 위한 연결장치로서 기능했습니다. 역사가 바로 '히스토리'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은 휘발되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지적 과정을 통해 왜곡될 수 있는 불완전한 도구였습니다.


2. '문자'로 업그레이드 - 책의 탄생


이를 깨달은 인류의 현자들은 보다 안전하고, 영구성이 있는 정보의 전승도구로서 '문자'를 만들어 냅니다.


집단과 조직을 운영하고, 권한을 행사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규범준수를 의무화하기 위해서도,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서도 문자를 통한 기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정보가 문자화 되어 사람의 몸 밖에 '외장'되자, 이제는 굳이 기억각인 장치로서의 '스토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무미건조하지만 의미를 지닌 정보체계들 또한 기록화 되기 시작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설형문자 기록에는 요즘식으로 따지면 회계장부와 세금관리에 관한 기록들도 발견됩니다.


문자로 된 기록들은 사람의 기억을 통한 말과 함께 전승의 도구로서 정보를 확산시킵니다. 인류 문화를 전승하는 도구로서 큰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문자는 언어와 같은 자연발화가 아니었기에, 배움의 과정이 있어야 했고, 결국 식자(識者)들의 전유물로서만 공유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문자의 기록물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문자를 기록할 매체와 수단들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습니다. '필사'라는 고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문자들의 뭉치들이 세상에 탄생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필요했지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인류는 드디어 '활자인쇄술'을 발명해 냅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이 도래했고, 바야흐로 '책의 시대'가 열립니다.


3. '읽음을 쌓다' - 지적 호기심의 미학


책이 쌓여 있는 모습을 쳐다봅니다.


제게는 인류지혜의 전승과 지적호기심의 '미학적 풍경'으로 보여 흐뭇한 미소가 절로 피어납니다.

일본어 츠운도쿠(積ん読)는, '츠무(積む: 쌓다)'와 '도쿠(読: 읽다)'가 결합된 합성어인데, 직역하면 "쌓아두고 읽다" 또는 "읽기 위해 쌓아두다"라는 뜻이 됩니다. 1980년대 이후 일본의 출판 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책을 구매하는 것 자체에서 만족감을 얻는 문화가 형성되자 만들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다른 언어에서도 유사한 개념을 표현하는 흥미로운 단어들이 있습니다. '블랙스완'으로 유명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Antilibrary'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읽지 않은 책들의 모음'을 의미하고, 부정적인 어원인 'Anti'가 붙었지만, 마치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일갈처럼, 무지를 상기시키고 잠재적 지식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Bibliophilia'라는 말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책에 대한 사랑'입니다. 독일어 'Bücherstapel'(책 더미), 프랑스어 'Livres en attente' (기다리는 책들), 스페인어 'Pila de libros por leer'(읽을 책 더미)라는 말도 유사한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장서'(藏書)문화도 비슷한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좁은 집에 책들이 쌓여갈 때마다, 가족들에 대한 혹은 책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안함 그리고 '눈치'도 함께 쌓여 갔습니다.


이제는 그 마음에 얹어 봅니다. 집 안에 '인류지혜 전승의 미학적 풍경' 한 페이지를 담고 있다는, 묘한 '자부심' 한 움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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