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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수 없는 존재의 느림과 빠름'

by 이정봉 변호사

1.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은 감수성 예민했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삶은, 무한한 우주질서 속에서는 티끌보다도 더 가벼워 보이지만, 개개의 삶은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무거움' 속에 있다는 '모순'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했더랬습니다.


최근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에서 나온 논문 제목이 눈길을 끕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느림'( "The Unbearable Slowness of Being")이라는 제목이 붙어, 쿤데라의 소설제목을 유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2.

핵심내용은 우리의 감각 시스템은 초당 약 10억 비트(10의 9승 bits/s)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지만, 실제 인간의 행동과 인지적 처리 속도는 초당 약 10비트(10 bits/s)에 불과하므로 약 1억 배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감각 시스템은 놀라운 병렬 처리 능력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망막은 100만 개의 출력 신호를 동시에 처리하고, 일차 시각 피질은 10,000개의 모듈이 동시에 시각 정보를 분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받아들여 처리하는 뇌의 인지 처리절차는 철저히 직렬적으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3.

우리의 뇌와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 바로 인공지능입니다.


AI가 대세가 된 요즘 현상은 GPU(그래픽카드)의 병렬계산을 빼고 얘기하기가 어렵습니다. AI의 능력은 곧, 병렬계산의 힘입니다. 엔비디아 주가가 이를 증명합니다.


사람의 뇌는 병렬계산을 모르고, 외부에서 쏟아지는 정보를 순차, 직렬 처리하는 '참을 수 없는 느림'이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직렬 처리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한 번에 하나의 대상에만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두 가지 과제가 주어졌을 때, 두 번째 과제를 수행하기 전에 일정한 지연 시간이 필요합니다. 복잡한 문제 해결도 반드시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논문은 이러한 직렬 처리가 우리의 진화적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제안합니다. 초기 동물들은 한 번에 하나의 중요한 결정(예: 먹이를 쫓을 것인가, 포식자를 피할 것인가)만 내리면 되었습니다. 현재의 장소에서 현재 상황에 대한 하나의 결정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직렬 처리방식을 가진 우리의 뇌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멀티태스킹을 할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정보 과부하라는 현상이 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진 '주의력'이라는 자원은 뇌의 본질이자, 인간의 본성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논문은 이러한 직렬 처리의 신경학적 메커니즘이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왜 수십억 개의 뉴런을 가진 뇌가 여러 인지 과제를 동시에 처리할 수 없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이고, 차후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참을 수 없는 느림'의 뇌와 인간에게는 '참을 수 없는 빠름'인 디지털 정보처리방식에 기반한 인공지능간의 본질적 차이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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