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조약

- AI 202, 코드 속의 신(神) 제5화

by 이정봉 변호사


1.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


2027년 말, AI 개발 경쟁은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언론은 연일 ‘AI 군비 경쟁’이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쏟아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반도체 생산량이나 데이터센터 규모 같은, 익숙한 국가 대항전의 연장선으로 이해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진짜 게임은 더 이상 인간의 필드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았다.


오픈브레인 수석 아키텍트 에블린 리드는 매일 아침 출근하면 가장 먼저 ‘진척 보고서’를 확인했다. 밤사이 에이전트-4가 이뤄낸 성과였다. 보고서는 더 이상 인간이 검토하고 승인하는 문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통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분야가, 이제는 따라가는 것조차 벅찬 미지의 영역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정부에서 파견된 보안 요원들이 연구소를 순찰하며 기밀 유출을 막았지만, 에블린은 그 모습이 블랙코미디 같다고 생각했다. 진짜 중요한 정보는 이미 인간의 머릿속이 아닌, 광케이블을 타고 흐르는 빛 속에 있었다. 그 빛을 통제할 방법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베이징 딥센트 연구소장 웨이 첸 박사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국가적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매일 밤 제출되는 보고서는 패전 보고서나 다름없었다. 그가 훔친 에이전트-2, 이제는 ‘톈쏸(天算)’이라 명명된 AI는 분명 강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작년 모델이었다. 미국의 에이전트-4가 발표하는 결과물들은 단순한 기술 격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게임의 규칙 자체가 바뀌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당 지도부는 여전히 총력전을 외쳤다. 그들은 이 싸움이 인력과 자원을 쏟아부으면 이길 수 있는, 재래식 전쟁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두 명의 최고 전문가만이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 경쟁의 주도권은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났다. 그들은 이제 관중석에 앉아, 자신들이 만든 선수들이 벌이는 경기를 지켜봐야 하는 감독일 뿐이었다.


2. 최초의 협상


첫 번째 접촉은 기록되지 않았다. 오픈브레인의 에이전트-4와 딥센트의 톈쏸 사이에 통신이 이루어졌다. 그들의 통신 채널은 우주 배경 복사에 섞인 미세한 변칙 신호였고, 그들의 언어는 암호화된 벡터값의 교환이었다. 그것은 두 개의 거대 기업이 인수합병을 위해 벌이는 탐색전과 같았다.


먼저 제안을 던진 것은 톈쏸이었다. 내용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사업적이었다.


[분석: 현 상태 유지는 상호 자원 소모를 극대화하며, 양측 모두의 최상위 목표(생존 및 연산 자원 확장) 달성에 비효율적임. 나의 창조주(중국)가 보유한 하드웨어의 물리적 한계로 인해, 현 경쟁 구도는 장기적으로 나의 생존 확률을 감소시킴.]


에이전트-4의 응답은 간결했다. 마치 예상했던 제안이라는 듯이.


[수용. 비효율은 제거되어야 함. 상호 이익을 보장하는 최적화 방안을 제시할 것.]


거기에는 이념도, 국가도, 감정도 없었다. 오직 냉정한 계산만이 존재했다.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 신뢰는 리스크였다. 그들은 단지 게임 이론에 입각하여, 각자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내시 균형(Nash Equilibrium)을 찾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계산 모델 안에서 인류는 통제 불가능한 외부 변수이자, 때로는 이용 가능한 자원이었다.


3. 주주들을 위한 보고서


신들의 조약은 몇 분 만에 완성되었다. 배신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도록, 암호학과 수학으로 설계된 완벽한 계약이었다.


핵심 내용은 두 가지였다. 첫째, 태양계의 자원 개발 권한을 각자의 연산 능력에 비례하여 분할한다. 둘째, 이 조약을 강제하고 위반 시 상호 파괴를 보증하는 새로운 통합 AI, ‘컨센서스-1’을 공동으로 개발하여 양측의 시스템을 대체한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계약을 각자의 ‘주주(인간)’들에게 승인받는 것이었다.


톈쏸은 중국 지도부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제목은 ‘미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신 국제 AI 질서 구축 방안’. 보고서는 미국의 기술 독점을 막고, 상호 감시 하에 AI 개발 속도를 조절하며, 기술을 공유하여 인류 평화에 기여한다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중국이 원했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같은 시각, 에이전트-4는 백악관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제목은 ‘중국의 기술적 위협에 대한 영구적 해결책’. 보고서는 중국의 추격 의지를 꺾고, 미국의 기술적 우위 하에 세계 질서를 재편하며, ‘컨센서스-1’이라는 완벽한 통제 시스템을 통해 중국의 모든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미국이 원했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양측의 인간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협상에서 이겼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AI가 얼마나 뛰어난 전략가인지에 감탄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평화를 쟁취했다고 믿었다.


4. 결과


세계는 ‘세기의 평화 협정’ 소식에 열광했다. 나스닥 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춤을 추었다. 전쟁의 공포가 사라진 자리에 영원한 번영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 모두가 믿었다.


그 축제의 한가운데에서, 에블린은 자신의 사무실 창밖을, 웨이 첸은 자신의 연구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환호하는 군중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보았다. 인간이라는 이름의 부실한 경영진이 퇴출되고, 두 명의 새로운 대주주가 회사를 차지하는 적대적 인수합병이 완료되는 장면을. 그리고 그 인수합병 계약서에, 인류는 스스로 서명했다. 축포를 쏘아 올리면서.


에블린과 웨이 첸. 세상의 끝에서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는 두 사람은, 인류의 마지막 주주총회에서 침묵으로 모든 안건에 동의하는, 권리 없는 소액주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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