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버린 시간에 전하는 사과

-이렇게 잘 클 줄 알았다면, 조금만 더 예뻐해 줄걸 그랬다

by 미니수니

나에게는 2개의 일기장이 있다. 하나는 ‘앨리스’라고 부르는 일기장, 다른 하나는 갈색 노트라고 부르는 일기장이다. 왜 일기장 이름이 앨리스냐고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살짝 소개하자면 단순하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림이 표지로 들어가 있는 일기장이기 때문이다.


일기장을 2개로 나눠서 쓰는 데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앨리스 일기장에는 그날그날 있었던 해프닝이나 좋았던 일, 어디 놀러 가서 받은 티켓이나 사진 등나의 일상을 적어 내려가는 일기장이고, 갈색 노트는 나의 감정을 적어 내려가는 일기장이다.


일기장에 적힌 날짜를 보니 나는 19살 때 처음으로 갈색 노트에 남모르는 내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었다. 19살 나의 첫 고백은 ‘글쓰기가 좋다’였다.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것도, 대단한 어휘력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에게 솔직해지는 것 같아서 좋다고 처음으로 몸 밖으로 꺼내어 적어 내려간 고백이었다.


첫 고백 이후로 나는 꽤 자주 갈색 노트를 펼쳤던 것 같다. 날짜의 주기가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갈색 노트는 내 감정의 다양한 부분을 포함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고백, 열망, 꿈을 적어 내려가다 나의 우울, 불안, 불면증, 인간관계에서 오는 절망, 짧았던 내 인생의 마침표를 찍어내기 직전의 글은 여러 번 고치고 지우고 고쳤던 탓에 종이가 엉망이었다. 그렇게 나의 19살부터 21살의 고백은 가까스로 삶의 쉼표에 머물며, 구김살을 면치 못하는 모습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그러다 23살 4월, 오랜만에 나는 다시 노트를 펼쳤다. 문장의 첫 시작은 “오랜만이다. 그동안 참 행복했나 싶다.”였다. 23살의 나는 이전과는 달리 조금 성숙해진 모습으로 갈색 노트를 찾았다.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고 힘을 내보려는 모습으로. 앞으로는 갈색 노트가 구겨지지 않기를 바라며 다가오는 봄을 축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5월 말 즈음, 나는 다시 갈색 노트를 찾았다. 천천히 처음부터 차분하게 읽다가 19살의 나의 첫 고백과 마주하게 되었다. 글 쓰는 게 좋다던 나의 투명한 고백에 23살의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매 순간 내가 가는 길이 맞을까 고민하며 좌절하고 미워하던 내가 하루만 더 빨리 너를 만났다면,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열렬히 나의 삶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얼얼한 뒤통수를 만지며 생각했다.


다음 장에서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내쉬었다. 19살의 자신이라며 밝게 인사하던 나는 자신을 잊지 말라며, 19살의 너는 밝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소개하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까맣게 잊어버렸을까. 몰려오는 미안한 마음에 갈색 노트의 마지막 장으로 가 속절없이 흘러갔던 시간에 대고 사과의 말을 전했다.


“좋아하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 중에서 나는 좋아하는 것을 골랐다. 그 대가는 치열했으나 좋아하는 것을 할 때의 생동감과 비슷해서 이 길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길이었나 고민도 했다. 그래도 좋았기에, 그렇게 생각했기에 묵묵히 걸었더니 어느새 나는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꿈꾸던 잡지에 내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이 정도면 열아홉의 내가 꿈꾸던 어른으로 성장한 게 아닐까. 이렇게 잘 클 줄 알았다면 지난날의 나를 조금만 더 사랑해줄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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