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설명할 때 나는 기꺼이 그대의 이름 석자를 적으리
할머니 댁 창가 아래에는 형형색색의 화분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거실 창 아래에 있는 화분만 해도 족히 10개는 넘는 화분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안방과 베란다, 작은 방과 큰 방에 있는 화분을 합치면 족히 3~40개는 될 거 같다. 그러다 보니 할머니 댁에 놀러 갈 때마다 항상 이번에는 새로운 화분이 생겼나 안 생겼나 구경하는 게 하나의 낙이 되었다.
어느 날 할머니 댁에 놀러 갔더니 창가 작은 화분에 못 보던 녀석이 생겼다.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모습이 아무리 봐도 꽃은 아니길래 이게 뭐냐고 할머니께 여쭤보니 ‘수태’라고 했다. 물이끼의 한 종류인 수태는 자기 몸의 20배나 되는 물을 머금을 수 있다고 했다.
저 작은 몸통 안에 자신의 20배나 되는 물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기특해서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더니 할머니께서 작은 쟁반에 따뜻한 쑥차와 사과를 깎아서 가져다주셨다.
달콤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따뜻한 쑥차를 한 모금 마셨다. 원래라면 쳐다도 안 봤을 쑥차였지만, 손발이 항상 차가운 나를 위해 할머니께서 내 입맛에 맞게 달달하게 내려주신 터라 목을 가볍게 쓸고 내려가는 느낌이 좋아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오후 3시쯤 되었을까, 따사로운 햇볕이 할머니 댁 거실에 화분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눈을 간질였다. 짧은 다과 시간이 마침 끝난 터라 눈을 따갑게 하는 햇볕도 피할 겸 할머니 허리를 감아 안으며 옆으로 누웠다.
낮잠을 자려 준비 중인 고양이처럼 할머니 옷에 코를 박고 비볐더니 할머니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할머니 향은 포근한 집 향 같으면서도 그리운 향이 난다. 섬유유연제 향과 체향이 섞인 할머니 향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몇 번씩도 더 안겼던 품이었는데 오늘따라 더 떨어지기 싫어서 더욱 바짝 붙었다.
이전에도 할머니 품에 더 많이 안겼을 터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첫 품은 중학생 때였다. 어머니와 대판 싸우고 가출 아닌 가출을 했을 때 갈 곳이 없던 나한테 가장 먼저 생각난 곳은 할머니 댁이었다. 커다란 가방을 들쳐 메고 울면서 달려간 할머니 댁에서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안아주셨다.
그 품에서 얼마나 울었을까 다 쉬어 버린 목 때문에 말도 못 하던 내게 할머니는 따뜻한 쑥차를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할머니 댁에서 울다 지쳐 잠들었을 때 어머니도 할머니 댁으로 오셔서 자신의 어머니 품에서 우셨다고 했다. 그날 할머니의 옷은 얼마나 젖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속에 묵직한 돌덩어리를 올려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내가 할머니 댁을 찾아가는 일은 더욱 많아졌다. 고등학교 첫 교복을 맞췄을 때, 친구랑 싸웠을 때, 수능이 끝났을 때, 대학에 합격했을 때, 장학금을 탔을 때, 첫 월급이 들어왔을 때 등등 기쁠 때도 제일 먼저 찾아가고 힘들 때도 제일 먼저 찾아가서 할머니 품에 안겼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작은 쟁반에 내가 좋아하는 과일과 따뜻한 차를 내게 내어주셨다.
수태는 자기 몸의 20배가 되는 물을 품고 있다고 했지만, 내 몸을 채우고 있는 할머니의 사랑은 내 몸의 몇 배로 표현해야 할까 고민이 된다. 오늘도 내 몸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따뜻한 물이 내 몸의 몇 배로 불어나 찰랑거리는 것을 느끼며 할머니 품에 머리를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