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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삶

by 최림


가족이란 이름 속에는 사랑과 따뜻함, 의무와 권리, 보살핌 등 각종 이미지가 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 것일까. 내가 여기는 가족은 돌봄과 생활, 하루의 시작과 끝이 있는 곳이다. 눈뜨고 시작할 수 있는 안락함과 따뜻한 갓 차린 아침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돌아와 나를 반길 집이 있다는 안식처의 역할이 컸다. 늘 내겐 그런 쉼과 휴식의 의미로 날마다 살아나가야 할 거처였다.


지금의 내겐 가족이란 무엇일까. 자식들이 각자 자기의 삶을 위해 거처를 옮기고 떠나보내니 쓸쓸하기 그지없는 그런 나날이다. 집에 들어와도 날 반겨주거나 기다려 주는 이 하나 없는 그런 적막이 흐르는 집은 따스함과는 거리가 멀다. 각자 자기의 인생을 살러 나갔지만 남들보다 이른 독립은 늘 나를 주눅 들게 하고 외롭고 쓸쓸함이 감돌게 한다. 크지 않은 집은 그나마 적막강산이라 불릴 만큼 내게 외로움을 선사했다. 그래서였을까? 난 근처 엄마에게라도 마음을 나누고 의지하려 했건만 매일 같은 마음일 수 없으니 엄마는 그저 내 가족이 아니라 부모였다.


자식이 다 크면 독립하는 게 맞다고 늘 아이들에게 되뇌었건만 정작 나는 그러질 못했다. 어쩌면 내게 하는 말이었나 보다. 내가 그러지 못했으니 자식들이라도 그렇게 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자초한 결과다. 누굴 탓하겠나.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길모퉁이마다 난 늘 그렇게 외로워하며 혼자라는 짐을 짊어지고 지극히 힘든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나 보다. 언젠가 내가 진 어깨의 짐이 무거워 내려놓으려 해도 이제 와서야 왜 그러냐는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으니 누굴 탓할 수 있을까.


나가서 돌아다녀 봤자 결국엔 가족의 소중함과 따스함을 느낄 새도 없이 내 가족은 다 내보낸 상태에서 난 늙고 병든 엄마를 면전에서 케어하고 있다. 누군가 K-장녀라는 말을 했다. 동생들을 돌보고 위로 오빠나 장남의 학업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가족의 기대에 져버리지 않는 삶을 살다가 결혼해 아들딸 낳고 결국엔 자신의 이름이나 정체성도 없이 늙어가는 그런 삶을 빗대어 말했다. 온갖 시대의 혜택은 아들에게나 주어버리고 가장의 짐부터 월급봉투마저 자기 것 일 수 없었던 장녀들의 아픈 삶을 이해나 할 수 있을까. 결국엔 삶의 언저리를 돌고 돌아 나이 들어서도 늙은 부모의 병시중이며 생활고를 책임지는 역할이 장녀의 삶이란다.


너무 젊은 홀로 된 엄마를 향한 어린 마음에 마음껏 투정도 어린 애교도 보내지 못한 채 그렇게 나이 들고 곁을 떠나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 마치 엄마만 나의 가족인 양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지천명이 지난 시간 동안 지내왔는데 이제 와 돌아보니 왜 그런 삶을 살았을까 싶다. 엄마의 희생은 선택이었고 나를 향한 당연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늘 엄마 맘속에는 나를 향한 속박이 자리했다. 가시 돋친 친척들과 지인의 말속에 나도 모르게 길들여지고 그렇게 해야 되는 거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으며 살아왔다. 왜 나는 이게 당연하다고 여겼으며 왜 한 번도 의문과 질문을 하지 못했나. 왜 나를 향한 생각 자체를 못하고, 내 가족과 자녀가 느껴야 했을 고통과 힘들었음을 생각지 못했을까.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아간다는 말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뭐든지 경험하고 익혀서 알지 못하면 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난 그저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보낸 셈이다. 내가 가졌던 자부심과 자랑은 사실 실체가 있던 것도 아니요 잡히는 것도 아닌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러니 삶은 뜬구름 잡기식이었다는 말이다. 하루하루를 즐겁게 먹고 싶은 것 먹으며 맘껏 가지고 싶은 것 가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은 그리워만 말고 즐거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 하루와 시간이 미치도록 아깝게 느껴졌다.


온 대지가 지면을 적시고 따스한 바람이 불던 자리에 비가 내리고 있다. 푸름을 머금은 나무들이 연둣빛 새싹을 피어내며 자기의 온몸을 다해 피어나고 있다. 꽃만 지천으로 피어나고 화려한 게 아니다. 삶이란 자기의 자리에서 피어나고 자리를 지키며 화려하진 않더라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그러니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것이겠지. 순간 나의 자리가 어딘지 궁금했을 뿐이다. 남들에게서 주어진 게 아니고 내가 선택하여 살아가야 할 내 삶 말이다.


늘 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칭찬에 목말라했고 인정받고 싶었으며 밤새워 읽던 책 속의 그를 나와 바꾸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삶이 늘 정체된 듯 헐떡이며 나를 채찍질했지만 그럴수록 늘 지쳐가고 힘들었을 뿐이다. 다만 내가 그리웠던 것은 나를 향한 인정과 사랑의 말이었나 보다. 늘 따뜻한 말과 응원이 필요했으나 언제나 내게 남은 것은 초라한 자신 뿐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으니 어린 나는 늘 자존심을 구겨야 했고 떳떳한 자아로 설 수 없었다. 결혼 후에야 비로소 인정받고 스스로 자신감을 회복했으니 그제야 홀로 설 수 있었다.


내가 가정을 이루고 살아나간 삶은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마치 그동안의 내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난 그런 시간들을 보내왔다. 늘 내게 집중하길 원했고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섰으며 배우는 것에 정점을 두고 늘 목말라했다. 미처 내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은 가져보지 못한 물건의 집착보다 더 큰 갈망이었으니 내겐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그땐 깨닫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그러는 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비로소 스스로 내 값어치를 드러낼 기회가 왔다 생각했다.


열심을 다해 자녀들을 돌보고 살았다. 시간을 쪼개가며 나에게도 열심을 내었으니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지나고 보면 나에게 있어서 결핍은 따스한 한마디였나 보다. 가시 돋친 나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 용기를 북돋워주고 나를 사랑한다 여기며 듬뿍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따스함이 늘 그리웠다. 난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노력했을 터이니 어쩌면 지금의 내가 만들어 낸 내 모습일 거다. 결핍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게 지금의 내 모습일 테니.


지나고 나면 깨닫게 되는 게 자기의 발자취를 돌아볼 여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다가도 '내가 왜 이렇지?' 하는 물음 속엔 나 자신에 대한 우문현답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일 테니.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들 자기의 처지를 좋게 여기며 만족할 수 있겠냐마는 나만큼 이런 생각을 자주 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아마도 난 지금 목말라 가고 있는지 모른다. 목 졸려 죽을 것 같다가도 숨 쉴 틈을 보면 미칠 듯이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가고 있는지 아는 이 또한 나뿐이니 내게 집중하고 있는 지금이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일 테다.


어리석게도 하루하루 줄타기하듯이 위태위태 한 시간을 지내고 있다. 엄마와의 관계는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이리 흘러가게 놔둔 책임이 크다. 쉼 없이 흐르는 죄책감과 사무치는 마음의 무거움을 내려놓고 싶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실체에 손 오그라드는 심정을 느낀다. 누군들 알까. 지금의 상태는 아무도 알길 원하지 않는 비밀이요 나만 알고 싶지만 두렵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지옥과 같다. 여러 복합적인 문제가 나를 휘감고 힘들게 한다. 내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듯 헤집어져 있으니 진정시킬 길이 없다. 그러니 어쩌랴. 이렇게라도 내 마음을 쏟아낼 공간이 없다면 이미 숨을 다했을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하고 온통 나를 구속하는 지금 내가 가진 것들로 인해 난 괴롭다. 누군들 남의 불행에 같이 손잡아 줄 수 없을 진대 들어주고 털어놓을 데 있다면 다행일까. 아님 또 다른 굴을 파는 효과일까. 두려움과 막막함 앞에 지나가는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마음가짐으로 보내리라. 그러니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와 다르지 않을 테니 난 오늘을 열심으로 보내면 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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