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림 May 02. 2023

조카는 딸인가 보다.

여운이 남는 하루


조카의 가다실 주사를 위해 병원 예약 시간에 만났다. 한국에 들어와 건강보험에서 가다실 처방 대상이니 맞으라고 여러 번 연락을 받았다. 사실 그 나이 때 여학생들은 고등학생이라 직접 맞지 않고 넘기는 경우가 많고 예민한 입시를 목전에 두고 있어서 보통은 나중으로 미루거나 돈을 주고 맞게 하는 게 일반적이다. 난 국가접종을 알지도 못해 미루기만 하다 맞히지 않았는데 첫 경험을 치르기 전 접종을 하는 게 좋으며 가장 이상적인 것은 남녀 모두 처방받아 3회 접종하는 것이다. 어쨌든 조카는 1회 접종을 한 상태고 동생네 부부의 부탁으로 2,3회 접종은 내 몫이 되었다.


앉아서 기다리니 처음보다 덜 아팠다며 웃는다. 2주 전 접종일이었으나 시험 기간 컨디션이 좋지 않아 1~2주 정도 미룰 수 있다 해서 오늘 약속을 했었다. 지난번 내 생일 때는 체했는지 오지 못해 마침 오늘 데이트 약속도 같이했다. 점심도 부실하게 먹었는지 별말 없어서 근처 닭칼국수를 먹으러 갔다. 매운 것을 못 먹는지라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의 칼국수를 좋아했다. 커피를 사겠다고 해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기고 생일 케이크라며 마스카포네 치즈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 두 잔을 사 갖고 다. 마음 씀씀이가 예쁘다.


서툰 한국어로 알아듣지만 선교사 부모를 따라다니며 보통 어른들을 같이 만나니 그래도 언어의 이해 폭이 넓은가 보다. 처음 3주 동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 했다면서 벌써 다른 친구들은 학습이 어려워 영어권 국가 대학으로 다시 입학을 한다며 떠난 친구도 있단다. 부모가 모두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어 어려움을 토로하자 수업 전 책 한 번 그냥 읽고 가라고 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자 이해하고 알아듣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웃는다. 리포트 작성의 어려움과 다른 친구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작은 어려움들이 있을 거라 했다. 과 조교를 찾아가서 도움받을 수도 있고 도우미가 같은 과 선배라면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을 물어보라 했다. 그래야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지 않겠냐고.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아직은 생일이 지나지 않아 만 17세인 조카를 보니 아직 아기 같다. 덩치만 크고 예쁜 젊음이 있지만 부모의 손길에서 스스로 자립해야 하는 지금이 막막할 것이다. 유학이라 부모는 우크라이나에 있으니 마음 또한 편치 않을 텐데. 부모가 떠나기 전 각자 꿋꿋하게 잘 살아내자 했다. 자기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온 힘을 다해 피어나는 중이다. 그렇게 난 또 하나의 꽃을 보고 있다. 내 조카지만 엄마, 아빠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 것이 헛되지 않았으니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당당하게 자기의 자리를 다지는 시간이 올 것이다.


몇 년 전 딸이 대학 입학을 했을 때 서울을 제외한 가까운 지역의 국립대가 되었다. 안전 지원 한 곳만 연락이 와서 학교를 갔지만 마음 붙이지 못하고 힘들어 울면서 재수를 말할 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하도록 독려했다. 한 학기를 보내더니 특별히 공부를 많이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성적이 상위권이 나왔다. 그때부터 공부에 재미를 붙여가며 매번 성적 장학금을 받아왔고 한눈팔 줄 모르는 성정에 연구실에서조차 많은 인정을 받고 있는 듯했다.


사람의 일은 모르는 거다. 자기의 자리에서 잘 피어나는 게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일인지. 딸의 경우를 보면서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게 뭔지 어렴풋이 깨달아 간다. 그때 딸의 나이가 어린 18세였다. 재수를 하고 들어온 동기보다, 친구들보다 생일이 늦어서였는지 내 눈엔 그저 어리고 유약하고 아기 같기만 한 어린애였다. 그런 어린애가 이제는 나도 20대 중반이라면서 대학원에서 남보다 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모두 지나온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 조카를 보면서 내 마음이 그때 딸을 대하는 마음과 같다. 혼자서 얼마나 힘들이며 살아가야 하는지 지금이 쉽지 않고 낯선 것 투성 일 테니 어느 것 하나 그냥 이뤄지는 게 없을 것이다. 이 순간을 잘 지나고 나면 다시 파릇한 봄의 새싹 같은 싱그러움이 묻어나고 자라 여린 잎사귀가 초록으로, 자기의 꽃을 피우며 열매 맺을 것이다. 그런 순간순간 잘 지켜주며 자라나도록 듬뿍 관심을 주어야겠다.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라 그런지 카페라테 위에 그려진 하트처럼 선명하게 여운이 는 하루였다.

작가의 이전글 자기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