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달간 중요한 일정이 껴있는 바람에 번역 아카데미에 등록할 수 없었지만, 일정 전후로 여유 시간은 많았다. 그동안 여유시간이 많을 때에 나의 행동과 사고가 어떻게 뻗어나가는 지를 관찰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느낀 바가 있다. 번역은 글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글쓰기는 좋은 텍스트를 읽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텍스트들을 읽다 보니, 그것들을 이해하려면 각종 고전에서 차용되는 메타포를 이해할 줄 알아야겠다 싶었다. 고전을 접하려 하다 보니, 인류의 역사를 모르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세계사를 압축하여 서술한 책을 들게 되었는데, 고대 인류의 철학이 나를 매혹했다. 그렇게 살짝 맛본 철학은 생각보다 삶과 밀착되어 있었다. 이런 흐름들을 따라 획득한 지식, 양질의 텍스트, 그리고 새로운 사상은 또 나의 삶과 글에 영향을 미친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타입이라,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될 순간들에도 꼭 관련된 책을 들어 궁금증을 해소해야 속이 시원했다. 아직 현업자가 아니니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런 공부가 번역가가 되는 데에 있어 절대 시간 낭비는 아닐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매력적인 글을 쓰는 일과 인문학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몇 달간 평소보다 더 많이 읽으며 꾸준하게 느껴왔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어떤 경험을 얼마나 해왔는지, 그 경험을 통하여 본인의 철학과 사상을 어떻게 확대해왔는지 등이 글의 깊이를 좌우한다. 심지어는 인문학과 상관없어 보이는 과학 분야의 글도 인문학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확한 사실만으로도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훌륭한 글을 만들 수 있겠지만, 어떠한 의도로 그 사실을 전하는가,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낼 것인가도 콘텐츠의 모습을 크게 좌우할 수 있다. 방송 ‘알쓸신잡’에 출연한 과학 분야 전문가인 정재승 박사와 김상욱 박사도, 본인들의 방대하고 깊은 과학 지식에 인문학적 통찰력까지 더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더욱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게 아닌가 싶다.
또한 인문학은 글쓰기 실력 말고도 조금 더 현실적인 방향으로도 나의 번역 커리어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아직은 넓은 인문학의 장에서 이건 무슨 맛인가 하고 시식을 하고 있는 정도이지만, 관심 있는 분야를 보다 좁혀, 관련 도서를 번역 기획하여 나의 색으로 만들 수 있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