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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공 Nov 14. 2021

소설은 고품질의 꿈이다

소설을 읽는 일은 꿈꾸는 것과 비슷하다. 꿈에서는 장소가 중요한 사건이 이루어지는 무대, 그 근처에서만 존재한다. 그 무대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어느 논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꿈을 꾼다면, 울퉁불퉁한 시골길, 소똥 냄새의 근원지일 것 같은, 약간의 싹과 갈려진 밭, 녹슬고 기울어진 전봇대, 저 멀리 보이는 산. 요 정도까지만 꿈속에서 존재하고, 그 산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그냥 새까맣게 텅 비어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꿈속의 등장인물도, 그 존재만이 존재한다. 어젯밤 꿈에 모르는 이성이 등장해서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자. 다음 날 아침에 그 시간이 아쉬워서 꿈을 되새김질하려고 해도, 연예인이나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 얼굴을 떠올리기 힘들다. 연예인이나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원래 알던 얼굴을 연상하여 꿈의 기억과 조합하는 것이지 꿈에서는 얼굴이 반쯤 짓눌리거나 사지가 몸통에 분리되지 않아 한 덩어리거나 하는 징그러운 형태였을 지도 모른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등장인물의 얼굴을 모르고, 장소도 그 일이 일어나는 주변 밖에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장소가 소설의 배경이라면, 뇌가 텍스트를 처리하여 마음속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조금 더 쉬워지겠지만, 그 장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 배경이 되는 시기가 언제인지 등 모든 정보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완전히 분명해질 수는 없다. 소설을 읽으며 마음속에서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그려낼 수는 없다. 그런 식으로 읽으면 한 페이지도 못 읽고 때려치우게 될 거다. 대충 꿈에서 그려지는 정도로, 이목구비가 불분명하고 사지가 한 덩어리인 정도로 인물을 머릿속에 그려내고, 부족한 부분은 작가가 공을 들여 조직한 정보와 나의 상상력, 감수성을 결합하여 채워낸다. 이 부분이 꿈과 소설이 비슷하며 다른 점이다. 꿈은 설계자도 감상자도 나이지만, 소설은 대표 설계자가 작가이다. 김영하가, 제인 오스틴이 일생을 바쳐 설계한 멋진 꿈을 내가 비교적 저렴한 책값으로, 때로는 무료로 꾸고 있는 거다. 물론 거기에 나의 상상력이라는 노동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 노동은 작품의 수용에 있어서 나의 자율성이 비집고 틀어갈 틈을 제공해주니, 이 정도면 너무나 가성비가 좋은 활동이 아닐까. 훌륭한 소설 작가들은 기꺼이 고품질의 꿈을 설계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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