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도 꿈을 꾼다

카프카의 『성』과 봉준호의 <기생충>: 닮은꼴의 비극

by 스카웃

영화 <기생충>의 계층 구조와 대립 양상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 속 인물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특히 기택의 가족 중 '기정'은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박 사장의 가족이 여름휴가를 떠난 사이, 기택 일가는 대저택을 점령하고 자신들만의 휴가를 즐긴다. 이때 거품 목욕을 하며 여유롭게 술을 즐기는 기정을 향해 기우는 “진짜 잘 어울린다”고 감탄한다. 끊임없이 애인에게 “나 어울려?”라고 되물으며 불안하게 확신을 구하는 기우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기정은 다른 가족들이 바닥에 앉아 있을 때 홀로 소파에 편히 기대어 눕고, 폭우로 화장실 물이 역류하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가장 높은 변기 위에 앉아 초연하게 담배를 피운다.


이 기묘한 장면은 자연스럽게 카프카의 『성』 속 아말리아를 떠올리게 한다. 마을의 모든 여성이 성의 관리를 신화적 존재처럼 숭배할 때, 아말리아는 관리의 연애편지를 심부름꾼 소년 앞에서 보란 듯이 찢어 던진다. 소설 속 “그녀는 두려움을 몰랐다”는 서술은 단순한 성격 묘사가 아니라, 계급 질서 자체에 대한 불복종의 선언에 가깝다.


그러나 이 고고한 불복종의 대가는 잔혹했다. 아말리아를 추방한 것은 관리가 아니라, 다름 아닌 같은 계급의 마을 사람들이었다. 관리의 눈밖에 난 순간, 그녀의 가족은 순식간에 타자화되어 불가촉천민과 다름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이 과정에서 연대란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성의 권력은 직접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피지배자들의 자발적인 배제와 내부 투쟁을 통해 스스로를 공고히 유지한다.


누가 선을 지키는가

이러한 구조는 <기생충>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반복된다. 기택 가족과 문광–근세 부부는 모두 ‘지하 생활자’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연대 대신 서늘한 서열이 존재한다. “불우이웃끼리 이러지 말자”는 문광의 호소에 충숙은 즉각 “내가 왜 불우이웃이야?”라고 선을 긋는다. 같은 계급 안에서도 타자를 밀어내며 자신만은 예외임을 증명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근세가 박 사장을 향해 외치는 “리스펙!” 역시 결을 같이 한다. 이는 지배자에 대한 순수한 존경의 표현이라기보다, 자신과 같은 계급의 타자를 더욱 아래로 밀어내기 위한 의례적 충성에 가깝다. 영화 내내 기정만이 박 사장 가족을 향해 거침없이 비속어를 사용한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기택과 충숙이 라캉적 의미에서 지배 계층인 '그들의 욕망을 욕망'하며 맹목적으로 선망하는 동안, 기정만은 끝내 그 질서에 완전히 편입되기를 거부한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말미에서 유일하게 죽임을 당하는 인물 역시 기정이다. 그녀는 방법이야 불법적이었을망정, 가족 중 유일하게 자신의 ‘능력’으로 위계의 사다리를 타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거창한 계급투쟁 이전에, 같은 계급 내부의 맹목적인 폭력에 의해 가장 먼저 좌절된다. 기정은 박 사장에게 “리스펙!”을 바치지 않았고, 그 꼿꼿한 불복종은 곧바로 처벌의 이유가 된다. 거품 목욕으로 반지하의 ‘냄새’는 지울 수 있었을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계급의 선까지 넘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순응에서 전복으로

영화는 궁상맞은 가족 코미디로 시작해 스릴러를 거쳐, 핏빛 부조리극으로 막을 내린다. 클라이맥스에서 기택은 박 사장을 찔러 죽인다. 이를 근세에 대한 연민이나 계급적 연대의 행위로 거창하게 포장하기는 어렵다. 기택의 칼부림은,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냄새를 피해 코를 막는 박 사장의 뼛속 깊은 무례함에 대한 반발이다. 그 순간 기택은 자신이 이웃이 아니고 그저 혐오의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도 근세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처지라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장면에서 <기생충>은 카프카의 『성』과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시스템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던 인물이 처음으로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주체적인 행동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크린 너머에 혁명은 없다. 기택은 살기 위해 다시 지하로 숨어든다. 연대를 통한 전복을 선택하지 못한 그에게 남은 생존 방식은 오직 ‘존버’뿐이다. 그는 자신이 기생충이라며 밀어냈던 타자의 자리를 온전히 계승하고 만다.


악인은 없다, 구조만이 있을 뿐

기택이 지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결말은 어슐러 K.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찬란한 유토피아 오멜라스는 단 한 명의 아이가 어두운 지하실에서 참혹하게 고통받아야 한다는 잔인한 전제 위에서만 유지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완벽해 보이는 세계에 명확한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생충> 역시 마찬가지다. 박 사장 부부는 악당이 아니다. 오히려 넉넉한 인품을 가진, 친절하고 교양 있는 인물들이다. 영화 속 유일한 ‘악한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기택 가족을 몰락하게 만든 '대왕 카스테라' 사업처럼 특정한 얼굴 없이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무자비한 순환 그 자체다. 우리는 더 이상 구체적인 누군가를 악으로 지목하여 돌을 던질 수 없는 격동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감독은 악인을 지워버림으로써, 구조의 잔혹함을 더욱 서늘하게 드러낸다.


가난은 고상하지 않다

<기생충>이 가난을 소비한다는 일각의 비판은 이 지점에서 길을 잃는다. 스크린 속 가난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욕하고, 악착같이 싸우며, 분노를 터뜨린다. 그러나 그 거친 태도의 근원을 개인의 타고난 불량한 자질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노엄 촘스키와의 논쟁에서 날카롭게 짚었듯, 억눌린 자들의 투쟁은 그것이 거룩하고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단지 생존하고 '이기기 위해' 벌어지기 때문이다.


“돈이 다리미라 주름을 쫙 펴준다”는 충숙의 뼈 있는 농담은, 가난을 개인의 천성의 문제로 재단하려는 시선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나아가 봉준호는 가난한 이들을 결코 착하고 순진한 약자로만 포장하지 않음으로써, 가난을 함부로 대상화하는 윤리적 함정을 영리하게 피행한다. 기택의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체념 어린 대사 역시 단순한 무능의 고백이 아니다. 아무리 발버둥 치며 계획을 세워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무력한 개인의 마지막 방어기제다. 그럼에도 그는 지하실에서 가족에게 편지를 쓰며, 어떻게든 끝까지 버텨보겠다고 약속한다.


봉준호의 특별한 '존버'

<기생충>의 '존버'는 소설가 김훈이 자신의 에세이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보여주는 삶의 숙명으로서의 건조한 버티기나, 2016년 히트를 친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 『편의점 인간』이 그리는 청년들의 폐쇄적 공간으로의 체념적 도피와는 명확히 결을 달리한다. 기우가 최저임금을 차곡차곡 모아 그 대저택을 살 확률은 사실상 0에 가깝다는 사실—봉준호가 최저시급으로 직접 계산해보니 돈 한 푼 안 쓰고 모으면 꼬박 564년이 걸린다고 한다—을 관객은 이미 짐작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택 부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낡은 가족주의적 성공 신화가 아니라, 언젠가 따뜻한 누군가의 손길이 닿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하지만 간절한 구원의 희망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개념처럼, 우리 사회가 '기생충'이라 명명하며 떼어내려 했던 비체(abjection), 즉 철저히 외면해온 존재들이 여전히 어딘가에 살을 맞대고 숨 쉬고 있음을 봉준호는 집요하게 각인시킨다. 그들은 저마다 가시 돋은 손을 뻗고 있다. 오멜라스의 끔찍한 지하실을 목격한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마을을 떠났듯, 우리는 과연 이 견고한 사회의 ‘성’에서 스스로 내려와 그 내밀은 손을 마주 잡을 수 있을까.


* 봉준호의 작품들에는 줄곧 주인공들이 좁은 방에 누워 행복한 꿈을 그리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하지만 <기생충>에서는 그 장면이 대저택으로 배경을 달리하며 서스펜스를 조성한다. 그리고, 결국 기택은 좁은 방에 홀로 남겨진다. 여전히 꿈은 꾸는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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