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 <어쩔 수가 없다>와 <헤어질 결심>의 신화적 목소리
흔히들 박찬욱의 대표작을 '복수 3부작'으로 묶어 부르곤 하지만, 나는 <올드보이>나 <어쩔 수가 없다>와 같은 그의 작품들을 '비극의 재해석'이라 부르고 싶다. 그의 작품 전반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핵심 기제는 바로 '신화적 목소리'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듣는 목소리는 그에게 형벌을 내리는 신적인 존재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 신화적 목소리에 놀아나는 오대수의 선택이 과잉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 혀를 잘라내기에 이른다. 15년의 세월을 지배한 신적 존재의 운명에 철저히 복종한 셈이며, 그 비극적 운명은 그의 '무지'로부터 출발했다. 파국을 향해 끝까지 나아가는 이 비극적 실패는 그를 단순한 오대수에서 신화 속 '오이디푸스'라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완성시킨다.
한편, <어쩔 수가 없다>에서 신화적 목소리가 전하는 신탁은 다름 아닌 '정리해고'다. 불가항력적인 현실, 즉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실재적 추상(real abstraction)이 바로 이 시대 신의 실체라고 한다면, 유만수는 그 비극의 문법 자체를 거부하는 인간이다. 다른 인물들처럼 술에 취해 절망하거나 다른 일자리를 전전하며 비극을 수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펄프맨으로서 끝까지 가고자 하는 그는 스스로 신이 되기로 결심한다. 구인란에 가짜 회사를 세워 경쟁자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일일이 제거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그 ‘목소리’로서 직접 전화를 걸어 면접 탈락 소식을 전한다. 그는 정해진 비극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고 자신이 마음먹은 것은 다 해버리며 비극을 정당화—유만수에서 '유분수'로—해버리고 만다. 유만수의 가족은 그 비극을 거름 삼아 자란 사과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을까?
이러한 신화적 목소리의 모티프는 <헤어질 결심>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에게 서래의 목소리는 마치 세이렌의 노래처럼 그의 운명을 강렬하게 뒤흔든다. "이제 바다로 가요. 물로 들어가요. 당신은 해파리예요. 눈도, 코도 없어요. 생각도 없어요. 물을 밀어내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밀어내요. 나한테……." 반듯하고 착실한 형사로 살아온 그는 이 목소리에 이끌려 서서히 붕괴하기에 이른다. 언제부터?
비극이 어떤 오해나 무지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넌 누구냐?", '누가 나를 떨어뜨렸을까? 누구 때문에 내가 떨어졌을까?'), 멜로드라마에는 언제나 뜻밖의 과도한 '앎'이 존재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처럼, 이러한 지식은 주인공이 아닌 타인에게 먼저 주어져 극의 결말, 즉 최후의 멜로드라마적 반전이 이루어지는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인공도 이를 깨닫게 된다.[1] 이 인식 구조는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이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왜 곧 파국의 순간이 되는지를 설명해 준다. 해준은 자신도 모르게 서래를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죠?"라는 반문처럼, 해준이 스스로 무너짐으로써 자기 파괴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그 붕괴를 고백한 시점부터 서래의 사랑도 시작된다. 이처럼 앎의 시차를 통해 미래의 감정을 교묘하게 조작하고 재배치하는 지점에서 멜로드라마는 절정에 다다른다.[2]
해준의 아내는 건강을 위한 금연과 규칙적인 섹스를 요구하지만, 해준은 도리어 서래의 담뱃재를 받아주고, 서래는 삶을 포기하리라 마음먹은 후 강렬한 키스를 돌려준다. 여태껏 서래(세이렌)의 목소리를 들은 남성들은 죽음을 맞았지만, 서래는 해준에게 영원한 미제 사건을 선물로 남기며 자신이 직접 죽음을 맞이한다. 해준은 서래의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수사의 발걸음을 옮기고, 그 도착점에서 스스로 미제 사건이 된 서래는 처음으로 타인이 아닌 자신을 끝까지 파괴함으로써 사랑의 원형만을 남긴다.
이렇듯 박찬욱의 영화적 언어로서 '목소리'의 기교는 <헤어질 결심>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러한 목소리 문법은 김병규 평론가의 말마따나 박찬욱의 '강박'일 수도, '영화가 의존하는 명쾌한 혼란'일 수도 있다. 목소리들이 서사를 장악해 온 박찬욱의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장르가 된다. 그가 전하는 목소리들은 트로이 목마처럼 기존 장르의 외피를 두른 듯하지만, 그 속에는 '명쾌한 혼란'과도 같은 전복적 쾌감이 담지되어 있다. 그의 장르라는 트로이 목마에서 내리는 파토스는 기존의 비극을 답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동시에 묵직한 메시지를 담아낸다.
그리고 ‘혼란’처럼 흐릿해 보이는 <헤어질 결심>의 목소리들은 어쩌면 흐릿하지 않다. (흐릿하다면, 과연 그것이 목소리뿐일까? 정훈희의 <안개>를 테마곡으로 한 이 영화에선 모든 것이 안개에 싸인 듯 흐릿하다.) 한국어가 서툰 서래가 '유일한'을 써야 하는 자리에 '단일한'이라는 표현을 써버리지만, 그들의 사랑은 유일하기를 넘어서 단일해지는 것으로 심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 각각이 맞은 관계성들에 대해서 흐릿한 확신과 뚜렷한 의심 중 후자를 택한다. 김병규 평론가는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준이 수색을 멈추고 고개를 하늘로 올려다보는 것이 박찬욱의 영화적 집착의 종말/종착점이라고 보았지만, 나는 그 집착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앞서 언급한 자신의 영화들의 주인공들처럼 끝까지, 끝까지 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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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대수-오이디푸스, 유만수-유분수, 서래-세이렌으로 이어지는 박찬욱의 명명법은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선다. 이 언어유희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롤리타』에서 구사했던 기법들과 흥미로운 유사성을 지닌다. 롤리타의 애칭 'Lo'가 물을 뜻하고 그녀의 '님펫'적 특성이 푸시킨의 시 속 물의 요정 루살카를 환기하듯, 서래 역시 물과 짙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롤리타』의 작중 인물 Clare Quilty가 'guilty(유죄)'를 활용한 언어유희이며, 작중에 공동 작가로 등장하는 Vivian Darkbloom이 Vladimir Nabokov의 아나그램(어구전철)인 것처럼 박찬욱의 명명 역시 철저히 계산된 유희다.
나아가 이들은 텍스트 외적인 오마주와 탈국경적 성격마저 궤를 같이한다. 서래의 첫 번째 남편으로 등장하는 노인은, 어쩌면 <올드보이>와 <헤어질 결심> 사이의 물리적 시간만큼 늙어버린 오대수의 노년으로도 읽힐 수 있다—감독 특유의 오마주가 이런 해석을 유혹한다. 또한 『롤리타』가 『돈키호테』와 같은 고전의 다시 쓰기이자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쓰인 대표적인 범국가적 망명 문학이듯, 박찬욱의 텍스트 역시 단 한 번도 틀에 갇힌 '한국적' 텍스트이고자 한 적이 없다. 중국인 여자와 한국인 경찰이 항구도시 부산에서 초밥을 먹으며 서로를 탐색하는 풍경은 그의 영화가 지향하는 탈국경적이고 혼종적인 정체성을 대변한다.
[1] 슬라보예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한보희 옮김, 새물결, 2008, 27쪽.
[2] 같은 책, 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