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를 대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곡이나 글쓰기, 그림 그리기 등 예술의 영역까지 인간보다 더 뛰어나게 해낼 거라는 류의 기사가 이제는 익숙하다. 소설가 AI, 화가 AI, 작곡가 AI가 나올 거라는 얘기다. 어쩌면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을 뿐 어딘가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AI는 결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예술이란 아직 아무도 간 적 없는 미지의 세계를 선지자처럼 먼저 인지해서 마치 꿈을 닮은 형태로 대중들에게 첫선을 보이는 행위이다. 예술가는 인간에게 알려진 세계와 아직 알 수 없는 세계의 접접에 서서, 인류의 프론티어를 조금씩 넓히는 일을 한다. 그런 면에서 요즘 아무나 보고 예술가라고 부르는 행태는 천박하기 그지없다. 노래를 잘 하거나, 춤을 잘 추거나, 악기를 잘 연주하거나, 그림을 잘 그리거나, 글을 잘 쓴다고 해서 예술가라고 부른다는 건 잘못된 일이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재주를 부려도 기존에 없던 새로움이 없다면 그건 ‘기능인’이지 예술가는 아니다.
예술가는 학자들이 아직 이론으로조차 정립하지 못한 세계를 탐험한다. 물론 학자들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순수문학이나 철학에서 영감을 얻는다. 아인슈타인의 작업실에 걸린 초상화의 주인공은 과학의 아버지 뉴턴이 아니라 철학자(작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상대성 원리를 구상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했다.)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심리학자 중 하나라고 했고, 칼 융도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았다. 문학작품과 철학이 심리학이나 물리학 연구의 등대가 되어준 것이다.
이처럼 예술가란 인간이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의 파이오니어(개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분야를 왜 개척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목적의식이 있어야 하고, 작품이 사회에 끼칠 영향에 대한 도의적 인간적 책임의식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인간의 오감을 사로잡을 궁리만 하는 사람들, 소위 '히트(대박)' 치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예술작품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상상과 사색을 하게 만들어야지 대중문화처럼 열광하고 따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예술가는 인생으로 작품을 담보한다. 예술작품을 접한 대중이 작가의 인생을 이해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훨씬 더 깊게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인생은 진실을 찾아 떠나는 한 여행자의 여정이며, 그 과정에서 형성된 예술가의 캐릭터는 작품에 녹아든다. 어린 시절과 첫사랑의 기억, 고통과 좌절, 성공과 기쁨, 사랑과 배신의 기억 등이 마치 작은 입자처럼 흩어지고 재구성되어 작품의 뼈대를 구성한다.
그래서 예술가의 인생은 작품의 진실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진실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겉 다르고 속 다른 인생을 살았다면 그의 작품은 하나의 현란한 거짓말일 뿐이다. 흔히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작품의 작가도 좋아한다. 같은 인간으로서 좋아하고, 존경하고, 나아가 함께 공명한다. 기계가 아무리 그럴듯한 것을 내놓아 봐야 거기엔 인생이 결여되어 있다. 인생의 숱한 고난을 온몸으로 통과한 한 영혼의 치열한 상흔이 없다. 기계가 사랑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는지, 기계의 인생 철학이 뭔지 내가 알 게 뭐란 말인가. 전부 그럴듯한 짜깁기에 불과한데.
AI가 적당히 커피숍이나 식당에서 틀 엠비언스 음악을 만들어내거나 호텔 객실이나 화장실에 걸 그림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거기까지다. 인생을 갖지 못한, 인간이 아닌 것이 하는 일이 생산활동일 수는 있어도 예술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