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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나무 Jan 28. 2022

인스타그램 vs 페이스북

이미지 vs 텍스트

인스타그램이 그림이라면 페이스북은 텍스트다. 인스타그램이 텔레비전이라면 페이스북은 책(북)이다.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는 의문을 갖기 쉽지만 둘 사이의 차이와 그로인해 미치는 영향은 굉장하다.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의 눈을 떠올려보자. 초당 수십장의 이미지가 연속해서 나타난다. 눈은 반사적으로 그림간의 차이, 즉 ‘움직임’을 쫓는다. 의식적으로 화면상의 안 움직이는 곳에 시선을 얼마간 잡아둘 수는 있지만 그마저도 장면이 전환되어서 다른 장소와 다른 인물이 나오면 헛수고가 된다. 텔레비전을 보는 내내 인간의 눈은 그저 반응한다. 다시말해 ‘질질 끌려다닌다.’




텍스트(책)를 보는 사람의 눈은 의도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움직인다. 한 글자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글자와, 단어와, 문장을 읽어내는 데 ‘의지’가 필요하다. 마치 정신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이라도 하듯 끊임없이 앞으로 한 발 한 발 딛지 않으면 가만히 보고 있는 것으로는 책 한 권도 평생 끝내지 못 한다. 책이, 또는 저자가 아무리 이상한 소리를 써놔도 스스로 선택해서 능동적으로 읽어나가지 않으면 그 이상한 소리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텍스트의 주도권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에게 있다. 아무리 좋은 작가의 작품도 독자가 자유의지로 선택해서 읽어내야만 가치가 생긴다. 




이미지를 바라보는 동안 인간의 뇌는 거의 전적으로 시각에 할당된 부분을 사용한다. 거기에 이미지가 움직이면서 소리가 더해지면 청각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추가로 활성화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수동적으로 감각을 받아들일 뿐이다. 이미지를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고, 소리를 들리는 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기억의 창고로 이동시켜 평생 고이 간직한다. 기억해 낼 수 없다해도 뇌의 어딘가에는 남는다. (그리고 가장 그 장면이나 소리를 기억해내지 말아야 할 순간에 갑자기 떠오른다.) 




글을 읽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시각과 청각 두 부분의 뇌를 동시에 사용해야만 가능하다. 오랜 세월 구전문화에서 생활했던 인간이 문자를 사용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말로 전해듣던 이야기를 글로 저장하고 전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글을 읽는 행위는 자동적으로 뇌의 청각 담당 부위를 사용해서 의미를 해석한다. 동시에 글에 담긴 장면을 능동적으로 상상해서 그려내고, 조합하고, 수정하는 복잡한 작업을 수행한다. 




글 읽는 사람의 뇌가 동물이라면 그림이나 동영상을 보는 사람의 뇌는 식물이다. 능동적인 움직임이 거의 없이 수동적인 반응 위주다. 간혹 특정 이미지에 반응해서 생각이란 걸 시도하겠지만 그나마도 장면이 바뀌면 연기처럼 사라지고 수증기처럼 증발한다. 




인스타그램만 10년 한 사람과 페이스북만 (텍스트 위주로) 10년 한 사람의 뇌는 어떤 차이가 있을지 불을 보듯 뻔하다. 



물론 페이스북이라고 해서 마냥 좋다고 추켜세울 순 없다. 그나마 SNS중에서 문자가 많은 포스팅의 비율이 높아서 인스타그램을 하느니보다 정신건강에 훨씬 나을 뿐이지 생각이 파편화된다는 단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책의 경우에는 작가나 저자도 쓰는 데 오랜 시간을 할애하고 독자도 비교적 오랜 시간과 의지를 들여서 읽고 생각한다. 잘 쓰인 책은 주제에 대한 생각을 여러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그리고 기승전결을 갖추어서 다룬다. ‘깊이와 넓이’가 있다. 




하지만 SNS의 경우에는 포스팅과 포스팅 간의 연관성이 요구되지 않는다. 책의 챕터들이 이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과는 정반대다. 만약에 책의 첫번째 챕터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어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얘기하다가 그 다음 챕터에서 갑자기 어떻게 튀긴 치킨이 맛있는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고든다면 어떨까. 작가나 출판사 편집부가 미쳤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SNS 포스팅은 그렇게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래서 페이스북에서는 비교적 장문의 글이라 해도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생각을 하다가 마는 경향이 있다. 파편화되어 생각이 흩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단문 위주로 농담따먹기에 최적화된 트위터나 생각이란 것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 인스타그램 보다는 훨씬 낫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역사상 가장 똑똑하다고 착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링컨 시대에 미국 정치인들의 대중 연설과 토론은 보통 7시간씩 이어졌고 1회 발언도 최소 30분 이상이었다. 발언 내용은 그대로 책으로 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적당히 길고 잘 쓰여진 문어체 문장들이었다. 그시대 사람들은 정보를 접할 수단이 책과 신문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 토론을 장시간 들어도 전혀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때 당시 대중 연설과 토론에 사용된 문장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몇 문장도 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초등학생에게 하듯 자세히 풀어서 구어체로 설명해줘야 알아듣는다. 




현대인들은 어쩌면 글자가 발명된 이래 역사상 가장 멍청한 세대에 속할지 모른다. 어떤 문제에 대해 마이크를 들이대며 물으면, 혹은 종이를 주면서 써달라고 하면, 텔레비전에서 본 소리 외에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다. 사회나 정치 문제에 대해서 그러는 데 멈추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인간의 사고력이라는 건 마치 뇌신경처럼 유기적으로 모든 분야가 연결된 개념이라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 중요한 선택들을 하는 사고과정에서도 동일한 능력이 발휘된다는 게 결정적인 문제다. 




과거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 사람들이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여러 책들을 골라 읽어가며 지식과 사고력을 키워 그를 바탕으로 인생을 살았다면, 요즘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좋다는 대로 산다. 통신기술의 발달로 남들 조언을 구해서 사는 경우도 있지만 그 조언이란 게 대부분 출처가 텔레비전이다. 결국 글(책)을 일부러 찾아서 읽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NPC((Non-Player Character)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가 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아무리 재치있게 말재주를 피워도 내용이 텔레비전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을 못 벗어난다면 NPC에 속한다. NPC를 면하고 싶다면 텔레비전과 인스타그램을 멀리하고 텍스트를 읽고 책을 읽어서 두뇌의 수동성을 제한하고 능동성을 향상시키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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