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
홍대 거리에 위치한 개미화방에 다녀왔다. 수많은 미술 도구가 있는 이층짜리 화방에서, 마치 이런 곳은 처음이라는 듯, 정신없이 구경을 했다. 구하기 어려운 갈색 시그노 펜, 모래 지우개, 연필 심을 보호할 수 있는 스프링 캡, 심지가 빛나는 연필, 삼각형의 연필깎이까지 알차게 바구니에 담았다. 물건을 고르는 기준은 '왠지 멋있음'이었고 책상에 조금이라도 나만의 취향이 생겨났으면 하는 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새 필기구로 쓰일 일기장을 상상하는 일 이후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 두 사건 사이에는 대략 일주일 정도의 공백이 있었다. 매일 일기를 쓰겠다는 다짐 같은, 스스로의 성실함을 시험하는 일 따위는 벌리지 않기에, 일주일이나 생겨버린 공백에도 거침없이 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었다.
2년째 쓰고 있는 176페이지의 MD노트. 나의 일기장. 베이지빛 커버에 때가 타 보기에 꾀죄죄하지만 채워나가야 할 페이지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2024년이 되고 처음 쓰는 일기였기에 정돈된 글씨로 글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한 페이지를 빼곡히 채운 후 늘 그렇듯 -해야지 하는 바람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일기를 쓰면 신기하게 하고 싶은 일도, 바라는 일도 많은 희망적인 사람이 된다. 손에 집히는 펜들로 막 갈겨둔 지난 일기들을 들춰보니 뿌듯함과 기록에 성실해지면 좋겠다는 마음이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아래의 문장이 떠올랐다.
우리의 마음은 쓰는 방향으로 커진다고 합니다.
희망 품기를 습관화하면
파산 후에도 다시 일어설 거란 희망을 품고
불안감을 품기를 습관화하면, 아무리 사업이 커져도 불안하기만 합니다.
100억이 되고 나면 1000억을 바라보게 되는 인간 마음,
옆의 동료를 바라보며 서로 웃으며 일한다면,
오늘의 사소한 성장이 내일의 큰 성장이 될 거라는 것에 희망을 품는다면
그 숫자는 생각보다 쉬운 일일지도 그리고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가슴속의 뜻과 희망,
그것만 잃지 않는다면 더 나아질 거라 믿어봅니다.
당신의 길을 응원합니다.
- 황호 드림
By. 데스커 라운지 편지
일기장에 적어둔 많은 바람과 희망들이 떠올랐다. 물개처럼 수영하고 싶다거나, 소중한 것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거나, 게으름과 싸우는 순간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거나, 눈부시게 빛날 수 있다거나, 기회가 닿는 모든 것들을 경험해보고 싶다거나.
그러나 모든 것이 단순하게 희망 품기 잘하기로만 끝나면 좋을 텐데, 나는 희망찬 품기만 할 뿐 그 이상 나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건 작년 날 계속 찜찜하게 만들던 고민이다.) 성취, 성과, 결과물처럼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것이 단지 허무맹랑한 희망뿐이라면, 이것만이라도 더 또렷한 모습으로 바꿔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장 속에 가만히 뉘어놓은 희망들을 실제로 꺼내보이고 싶어졌다. 구체적이지 않고, 망기적대며 머릿속을 떠다니기만 한 많은 꿈들이 글로 다시 태어난다면 어떨까? 내가 정말 다시 태어나게 만들 수 있을까? 그렇게 한다면 마음으로만 살아가지 않음과 동시에 지금보다 더 또렷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