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아무도 아닌] 中 「양의 미래」
* 황정은 소설집 [아무도 아닌] 中 「양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그 일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스쳐간 한 아이가 ‘임금님의 당나귀 귀’가 되어 내 삶 속으로 잠영했다. 문득 생각나 얼마간 골똘해지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누구에게도 쉬이 그 일을 설명할 수도 문장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그 애와 나는 무관했기에 잘 먹고 잘 잤다.
그 도시에 처음 간 건 20대 중반쯤이었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만으로 설레던 시절이었다. KTX 운행이 시작되었지만 주로 무궁화호를 타고 그곳까지 갔다. 2시간 넘게 달려 역에서 내리면, 다시 좋아하는 동네까지 버스를 타고 1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바다가 있는 동네에서 여행의 피로 같은 것은 한 번도 느끼지 않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두컴컴한 새벽, 랜턴도 없이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 보면 두려움에 압도되는 순간도 있었지만 수평선 위로 떠오르며 바다를 녹이는 붉은빛은 모든 걸 이겼다. 그 빛 때문에 몇 번이고 기차에 올랐다.
또 다른 재미는 맛집을 찾는 일이었다. 당연히 내비게이션이나 지도 앱 같은 것들이 없었고, 폴더 핸드폰 중앙에 박힌 인터넷 버튼을 누르기에 내 용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동행한 친구들도 사정은 비슷했기에 우리는 열심히 주위를 돌아볼 뿐이었다.
그러다 그 애를 봤다. 체크무늬 교복 치마를 입은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아이는 문자를 쓰고 있는지 양손으로 핸드폰을 받치고 열심히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휴대폰을 보느라 아이의 걸음은 느려졌고 우리와 아이 사이는 점점 좁아졌다.
평일 오전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상기시키며, 아이가 왜 이런 시간에 이 거리를 우리와 나란히 걷게 된 걸까 궁금해했다. 친구들이 농담으로 내 물음을 받아쳤고 우리는 까르륵까르륵 웃었다. 그토록 우스웠던 친구의 말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친구들은 다시 우리가 갈만한 식당을 찾느라 바빴고 나는 열심히 그 애를 관찰했다. 쉼 없이 문자를 보냈고 딱 한 번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난히 광이 나는 검은색 세단이 그 애 옆에 멈춰 섰다.
황정은의 소설 「양의 미래」 속 ‘나’는 일하는 서점에서 교복을 입은 채 담배를 사러 온 소녀를 만난다. 담배를 사겠다는 소녀 곁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인 남자 둘이 있다. 소녀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킨 남자들이다. ‘나’는 불편한 마음이 들어 소녀에게 관계를 물어볼까 경찰에 신고할까 고민한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녀 ‘진주’가 사라진다.
짙게 선팅된 조수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자, 아이는 괜히 사방을 한번 살피고는 검은 차 곁으로 걸어갔다. 인도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차 안에 있는 사람과 어떤 말을 나누는 것 같았다. 앞서 걷던 아이가 검은 차 속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이, 우리는 검은 세단에 근접했고 나는 괜히 속도를 늦춰 걸었다. 운전석에는 중년의 남자가 몸을 비틀어 아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문자 보냈잖아. 아저씨가 전화한 아저씨야.” 남자는 외치는 말했다.
내가 들은 남자의 목소리는 진짜였을까? 이렇게 구체적으로 헛것이 들릴 수도 있을까? 몇 번을 생각해도 다른 말이 골라지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황정은 소설가의 문장을 꼭 빌리고 싶다.
그건 정말 이상한 광경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게 별로 없어 보이는 데도 그랬다.
나는 이 문장을 수십 번 곱씹어 읽었다. 몇 해 전 그 일이 정확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와 중년의 남자가 전혀 모르는 사이이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날 처음 연락을 주고받고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 무얼 할 수 있겠냐고 자문했으나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이었다.
비정한 목격자.
보호가 필요한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은 어른.
나는 그게 되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돌아봤을 때 보조석 차창은 이미 올라가 있었고 아이는 차 옆으로 갈 때처럼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보며 보조석으로 사라졌다. 배시시 웃는 아이의 얼굴. 아이의 행동은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보였지만 얼굴엔 미소가 있었다. 얕게 올라간 아이의 입꼬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는 은밀한 신호처럼 보였고 나는 충실한 아군이 되어 따랐다.
나는 언젠가 그날의 나의 마음을 글로 적어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소와 긍정이 언제나 한 쌍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면서부터는 더욱 그랬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래도 될까,하는 의문을 던지며 나를 막았다. 어리석은 상상을 나눌 필요는 없다고 자조하면서.
시간은 무심히 흘렀다. 나는 이제 아이보다 중년의 남자와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진주 어머니처럼 나를 찾아와 아이에 대해 묻는 이는 없었지만 내가 무언가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에 깊이 빠진 밤이면 어김없이 한때 내가 좋아했던 도시에서 스쳐간 그 아이가 나의 몸 이곳저곳을 아프게 떠다닌다.
나는 이제 그 도시에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