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꿈은 왜 반복되는가?

신수원 감독 [오마주]

by 히스클리프

* 신수원 감독의 영화 [오마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몇 년 만에 또 그 꿈을 꾸었다.

영사 사고가 일어난 영사실에서 허겁지겁 뭔가를 하고 있는 꿈. 그 꿈에서 난 늘 혼자다.

이번에는 맥락도 없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갑자기 필름 합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곧바로 영사기에서 필름을 내리고(램프를 닫고 끄는 과정은 꿈속에 등장하지 않았다.) 편집 작업대로 릴을 옮긴 후 속도를 재빨리 높여 연결점을 찾는다. 손가락 사이에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지자마자 속도를 0으로 낮추고 연결된 필름의 위아래를 빛에 비춰보다가 그대로 통과. 무슨 이유에서인지 필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기만 할 뿐 잘못된 지점은 발견‘되’지 않고 반대편으로 고스란히 감기고만 있다.


원활한 이해를 위해 상영용 필름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해야겠다.

현재 대부분의 멀티플렉스 상영관은 디지털로 대체되었지만(일부 예술영화전용관에는 여전히 35mm 필름 영사기가 있고 간혹 상영도 하고 있다) 매주 수요일에서 목요일이 되면 필름 박스가 영사실에 쌓이던 때가 있었다. 목요일 혹은 금요일 개봉에 맞춰 도착한 박스에는 4~6개 사이의 캔이 담겨있는데, 캔 하나 당 평균적으로 15~20분 분량의 필름이 감겨 있다. 상영 전 간단한(새 필름의 경우) 검수 과정을 거쳐 이를 순서대로 하나로 연결하는 합본 작업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분할되어있던 것을 필요 없는 부분을 제외하고 스플라이싱 테이핑 작업을 통해 상영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 없는 부분이란 본편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필름으로 영사실에서는 ‘무지 필름’ 혹은 ‘리드 필름’ 등으로 불린다. 무지 필름에는 말 그대로 아무 정보도 입력되어있지 않다. 영상도 사운드도 없다. 필름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크다. 새 필름의 경우 합본 작업 시 본편의 1 프레임을 앞뒤 무지 필름 쪽에 붙여 커팅한다. 작업자에 따라 2~3 프레임을 자르기도 한다. 자연스러운 연결을 위해서 더 많이 자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다시 꿈으로 돌아가자.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정확히 찾기 위해서는 커다랗게 하나로 연결해 놓은 필름에서 이음새 부분을 찾아, 각각의 필름이 담겨있던 캔에 남아있는 ‘무지’ 필름의 첫 프레임과 대조해야 한다. 그런데 꿈속의 나는 필름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저 옮기고 있을 뿐이다. 이를 자각하는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꽤 오랫동안 영사 일을 했다. 필름으로 일을 시작해 자격시험을 봤는데 디지털 상영을 더 많이 하다가 퇴사했다. 디지털화는 전 세계적 숙명이었기에, 멀티플렉스는 필름 영사기를 뒤로하고 디지털 상영을 위한 기반을 다졌고 이제는 디지털 상영이 당연해졌다.(이렇게 쓰니 내가 매우 옛날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그것도 맞지만, 이 과정이 지나치게 빨랐다는 것도 알아주시라.) 자원이나 비용 차원에서 당연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필름 상영의 매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쉬운 마음도 크다.


영화 [오마주]는 슬럼프에 빠진 영화감독 지완(이정은)이 한국의 두 번째 여성 영화감독 홍은원의 영화 <여판사>의 필름을 복원하게 되면서 겪는 일들을 담고 있다. 과거 여러 가지 이유로 편집되었던 <여판사>의 16mm 필름 조각을 우연히 찾게 되고 당시 동료였던 편집기사 옥희(이주실)와 함께 영화를 복원한다. 그가 오랜 세월 가지고 있었을 16mm 영사기와 접착용 시멘트를 사용해.



어찌 보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이고 가장 아름다워야 할 순간에 나는 문득 ‘당시에도 상업영화는 35mm 필름으로 촬영했을 텐데’ ‘스틴벡(steenbeck)이 있으면 더 편하게 편집할 텐데’ 같은 생각을 했다.

영사실에서 나온 지 10년. 물론 이후 몇 년 동안 영화제 일을 간간 하긴 했지만 이젠 그마저도 하지 않는데, 영화제를 비롯한 영사실에서의 경험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굳이 필요 없는 순간에도.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번민하던.


돌아보니 내 꿈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영화제에서 일하게 된 후로 종종 영사 사고가 일어나는 꿈을 꿨다. 정상적으로 풀리며 영사기를 통과해 상영되고 있는 필름이, 감기는 쪽에서 릴이 아닌 바닥으로 떨어져 수백수천 미터로 쌓여 영사실 층고 반쯤을 채우던 꿈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 시절로부터 나는 한참 멀어졌는데, 왜 내 꿈은 그때를 놓지 않는가.



영화 [오마주]에서 지완은 모자를 쓴 여성의 그림자를 본다.


그림자처럼 존재했던 어떤 감독처럼 영화와 영화제를 좋아했던 과거의 나도 오래된 필름 캔에 쌓인 먼지라도 되어 어떤 흔적이라도 남겼을까? 내가 꾸는 꿈은 그 자리에 대한 슬픈 꿈일까? 그렇다면 나는 언제쯤 이 꿈을 마지막으로 꾸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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