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대통령 선거와 봄 소풍

by 고영주




​​"어떤 승리는 패배보다 서늘하고, 어떤 낙선은 당선보다 뜨겁다. 1971년의 봄, 한반도의 산하를 가로질렀던 그 운명의 대선은 우리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거대한 함성이자 소리 없는 곡비(哭悲)였다."


그 운명의 결과와 뒤안길


개표 초반,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민심은 무서운 기세로 김대중에게 쏠렸다. 금방이라도 야권의 승리가 손에 잡힐 듯 보였으나, 캄캄한 새벽 즈음 전황(戰況)은 기묘하게 뒤바뀌기 시작했다. 최종 집계 결과 634만 대 539만. 94만여 표의 차이로 박정희는 신승(愼勝)의 가슴을 쓸어내렸고, 김대중은 석패(惜敗)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특히 전주는 허탈과 형언할 수 없는 적막이 뒤섞인 기이한 정적에 휩싸였다. 천 년 고도의 골목마다 응축되어 있던 민심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변화를 염원했으나, 새벽녘 날아든 패배의 소식은 그 뜨거웠던 열망을 순식간에 차가운 재로 만들어 놓았다. 도시는 낮게 깔린 탄식 속으로 침잠했다.


공화당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기쁨은 짧았다. 뒤이은 총선에서 나타난 야당의 약진이 절대 권력자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기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민심의 이반을 목격한 권력은 이제 법의 외피마저 벗어던진 채, 마침내 '유신(維新)'이라는 초법적 결단으로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이는 빙하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당선 확정 후 단상에 오른 박정희는 정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나타난 국민의 뜻은, 우리가 피땀 흘려 일궈온 '중단 없는 전진'을 결코 멈추지 말라는 지상 명령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북괴의 침략 야욕에 맞서 싸워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서 있습니다. 우리 모두 싸우면서 건설하고, 건설하면서 싸웁시다. 공업 입국의 길을 넓히고 농촌 근대화를 앞당겨, 이 땅에서 가난의 그림자를 영원히 걷어냅시다."


​그는 대통령 당선이 "국민의 엄숙한 명명(命名)"이라 칭하며 권력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연설 말미에 "다시는 나를 뽑아달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묘한 여운은, 장차 도래할 1인 장기 집권의 암울한 전조(前兆)였다.


​반면, 패배의 쓴잔을 마신 김대중은 "이번 선거는 관권과 금권이 뒤엉킨 추악하고도 불평등한 싸움이었다"라고 일갈했다. 비록 현실의 표 대결에서는 밀려났으되,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만은 결코 꺾일 수 없음을 사자후처럼 토해낸 것이다.


​이 선거의 이면에는 차마 씻어내지 못할 금권(金權)과 관권(官權), 그리고 정보정치라는 삼악(三惡)의 오명이 짙게 배어 있었다. 공직자들은 여당의 선거병(選擧兵)으로 전락하여 민의를 왜곡했고, 마을마다 난무한 막걸리와 고무신은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농단했다.


​무엇보다 비극적이었던 것은 권력 유지를 위해 '지역감정'이라는 망령을 소환한 것이었다. 영남의 대지에 뿌려진 흑색선전은 한 뿌리였던 국민의 마음을 잔인하게 갈라놓는 독배(毒杯)가 되었고, 의혹으로 점철된 개표 과정은 그날의 승리 뒤편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역사의 얼룩을 선명하게 각인시키고 말았다.




덕진공원 봄소풍, 김밥과 사이다


어머니의 새벽은 탁탁탁 도마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삼일 후,손꼽아 기다리던 금요일은 봄 소풍날이었다. 부엌의 낮은 창으로 푸르스름한 미명(微明)이 스며들 때쯤 어머니는 이미 커다란 양푼에 밥을 푸고 계셨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흰쌀밥을 고소한 참기름과 소금으로 밑간을 하셨다. 참기름 냄새는 집안 구석구석을 깨우며 번져 나갔다. 프라이팬 위에서 '치익' 소리를 내며 노랗게 익어가는 계란 지단과 분홍색 소시지의 빛깔은 가난했던 시절의 부엌을 잠시나마 화려한 잔칫집으로 둔갑시켰다. 어머니는 김밥 한 줄을 말 때마다 온 신경을 손끝에 모으셨다.

​어머니는 이냐시오 형과 5학년 세실리아, 3학년 헬레나 누나와 내 것까지 네 명 분의 김밥 도시락을 준비했다. 어머니는 내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발에는 하얀 타이즈를 신겼다. 나는 파랑과 빨간색이 섞인 기차표 운동화를 신었다. 동국민학교를 출발한 우리의 소풍행렬이 도착한 곳은 덕진공원(德津公園)이었다.

​전주 사람들에게 ‘덕진련(德津蓮)’이라는 애칭으로 더 친숙했던 그곳은, 단순히 공원을 넘어 태조 이성계가 전주 이 씨의 발상지인 건지산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전설이 흐르는 신성한 땅이기도 했다.

​여덟 살 소년의 눈에 비친 덕진호는 바다보다 깊고 넓었으며, 호수 위를 가로지르는 연화교는 흡사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구름다리와도 같았다. 4월의 말, 아직 연꽃이 그 붉은 입술을 열기 전이었으나 수면을 가득 채운 푸른 연잎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은빛 군무를 추었다.

단짝 친구인 ​현철이 가족들과 우리는 정성껏 준비해 온 도시락을 풀어놓았다. 노란 도시락 뚜껑을 열 때마다 피어오르던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먹음직스럽게 잘 말아진 김밥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사이다 한 병과 삶은 달걀, 그리고 눈깔사탕 몇 알이 놓였다. 사이다 병마개를 딸 때 터져 나오던 그 예리하고도 청량한 '치익' 소리가 마치 축포소리처럼 들렸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덕진공원의 울창한 숲과 연못가를 누비며 '보물찾기' 놀이에 몰두했다. 현철이와 나는 취향정(醉香亭)의 낡은 기둥 뒤나 연못가 버드나무 밑동을 샅샅이 훑으며, 그 속에 숨겨진 미지의 행운을 찾아 헤맸다.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층층이 쌓여갔다.


​ 지금도 볕이 낮게 깔리는 봄날이면, 나는 그 연못가 버드나무 밑동 어딘가에 내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소중한 보물이 여전히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아 가만히 눈을 감아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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