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사생대회

by 고영주


​오월 초이렛날의 태양은 초봄의 수줍은 온기를 떨쳐내고, 대지 위로 찬연한 생명력을 쏟아부으며 여름의 전령(傳令)을 자처하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형형한 쪽빛으로 거듭난 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은 갓 피어난 초록의 이파리들을 간질이며 운동장 구석구석에 싱그러운 풀 내음을 실어 날랐다. 오랜 세월을 견딘 고목의 그늘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빛은 마치 은화(銀貨)처럼 반짝이며, 공교육의 엄격한 규율 속으로 막 편입된 어린 생명들의 머리 위로 축복의 세례를 선사했다.

천진한 영혼들의 해방


​아직은 부모의 치마폭이 더 익숙할 법한 이 어린 군상(群像)들은, 교사의 근엄한 훈시가 끝나기 무섭게 우리를 탈출한 강아지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며 원시적인 활기를 발산했다. 코끝에 매달린 콧물을 소매로 쓱 문지르면서도 눈동자만은 보석처럼 빛내던 그들은, 제도라는 질서에 길들여지기 이전의 거칠고도 순수한 생명력으로 운동장의 정적을 깨뜨렸다. 삶의 비애나 세상의 풍파 따위는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는, 무구(無垢)함 그 자체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눈부신 햇살 속으로 흩어져 갔다.

​나를 포함한 코흘리개들은 제 몸집만 한 도화지를 펼쳐놓고 크레파스를 쥔 채, 각자의 내면에 잠든 우주를 소환하기 시작했다. 가지런하게 놓인 원색의 크레파스들은 아이들에게 허락된 가장 화려한 수사(修辭)였다. 우리는 손가락 마디마디에 알록달록한 가루를 묻혀가며, 현실의 색조를 넘어서는 저마다의 진경(眞景)을 화폭 위로 토해냈다.

​도화지 위, 지평선 너머로 이글거리는 태양은 선혈보다 붉은 광기로 타올랐고, 운동장을 호위하던 플라타너스들은 유난히도 짙푸르게 채색되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 묘사가 아니라, 유년의 망막에 맺힌 강렬한 관념의 실체였다.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내려온 햇살의 파편들이 점묘화처럼 도화지 위로 내려앉았다. 크레파스가 거친 표면을 긁으며 내는 둔탁한 마찰음은, 마치 한 영혼이 세상에 내딛는 첫 발자국 소리처럼 들려왔다.

​크레파스 끝을 잡고 덧칠을 거듭하던 그 순연(純然)한 몰입. 그것은 논리적 문법이 정립되기 전, 색채라는 원초적 언어로 세계를 구성하는 찰나였다. 아이들의 상상력이 도화지라는 광활한 영토를 거침없이 누비고, 아이들 각자가 꿈꾸는 낙원의 모습을 고사리 같은 손끝으로 정밀하게 그리고 있었다.

​이 무구한 몰입의 끝에서 완성된 것은 단순히 풍경의 사본(寫本)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마 언어로 형상화하지 못한 내면의 비명이었으며, 거대한 규율의 격자(格子) 속에 갇히기 직전의 영혼이 최후로 발산한 자유의 갈구(渴求)였다. 훗날 삶의 풍랑 속에 내던져져 명분과 실리라는 차가운 계산에 매몰될 때마다, 내 영혼을 지탱해 준 것은 다름 아닌 그날의 둔탁한 마찰음이었다. 세상을 향한 명민한 분석이 막힐 때면, 나는 어김없이 오월의 나무 그늘 아래서 직조했던 그 치졸(稚拙)하지만 찬란했던 낙원을 회상하며 메마른 정신을 적시곤 했다.

​돌이켜 보건대, 그날의 사생대회는 내 평생에 걸친 실존적 투쟁의 전초전(前哨戰)이었는지도 모른다. 도화지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무한한 우주를 구겨 넣으려 했던 무모한 시도는, 훗날 내가 세상을 해석하고 인생의 비의(秘義)를 탐구하는 근원적인 동력(動力)으로 변모하였다. 서툰 묘사와 거친 색채의 배합은 논리가 가닿지 못하는 생의 이면을 응시하게 했으며, 만질 수 없는 햇살을 형상화하려 애쓰던 그 고통스러운 즐거움은 내 사유의 태반(胎盤)이 되었다.

​비록 세월의 먼지가 쌓여 원색은 퇴색하고 기억의 화폭은 군데군데 헐거워졌을지언정, 세계를 재구성하던 그 경이로운 감각만은 내 혈관 속을 흐르는 영원한 문법으로 남았다.

삶의 중턱에 서서 지난날을 반추할 때, 내가 쓴 모든 문장은 결국 그날 도화지 위에 뿌려놓았던 색채들의 변주(變奏)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나는 오늘도 생(生)이라는 이름의 막막한 사생대회 위에 서서, 그 시절의 지독한 순수를 기억하며 나만의 진실을 집요하게 채색해 나가고 있다. 그것은 완성될 수 없는 그림을 향한 영원한 구도(求道)이자, 오월의 햇살 아래서 시작된 내 영혼의 긴 여정(旅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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