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방의 어둠, 그 황홀한 도피

그 은밀한 필사(筆寫)의 기록

by 고영주



​세실리아 누나의 황홀한 도피


학교를 마친 세실리아 누나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만화방의 안온한 어둠이었다.


만화방의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바깥세상의 오월은 일순간에 소멸하고 오직 묵직한 종이 냄새와 눅눅한 세월의 체취만이 지배하는 별천지가 펼쳐졌다. 그곳은 가난이 숙명처럼 어깨를 짓누르던 궁벽한 현실로부터 허락된, 유년의 가장 은밀하고도 황홀한 망명지(亡命地)였다.


만화방은 인후동에서 풍남국민학교 쪽으로 언덕길을 내려가다가 기자촌 방향 왼쪽 대로변에 있었다. 세실리아 누나는 익숙한 듯 만화방의 가장 구석진 자리, 희미한 백열등 전구가 졸고 있는 서가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누나의 손에 들린 엄희자의 《공주의 기사》는 당대 소녀들의 가슴을 저미게 했던 비극적 서사를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누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비장미 넘치는 주인공들의 눈물 섞인 대사에 빠져들어갔다. 화려한 드레스와 가면 뒤에 숨겨진 출생의 비밀, 그리고 신분을 초월한 애달픈 연정(戀情)은 누나의 머릿속을 차분히 식혀주는 감정의 정화수(井華水)와도 같았다.


​세실리아 누나에게 만화방은 단순히 비극적 서사를 탐닉하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깃든 조형적 열망을 확인하는 은밀한 화실(畵室)이었다. 누나가 낡은 가방 안에서 조심스레 꺼내놓은 연습장 위로 희미한 백열등의 잔광이 비치면, 그곳은 이내 일상의 중력이 미치지 않는 기묘한 창조의 공간으로 변모하곤 했다.


​누나의 필치는 놀라울 만큼 정교하고도 집요했다. 엄희자의 주인공들이 가진 그 비극적인 눈망울—세상의 모든 고뇌를 응축한 듯한 거대한 눈동자와 그 안에 맺힌 영롱한 하이라이트—을 누나가 연필 끝으로 되살려낼 때면, 그것은 이미 단순한 모사(模寫)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선 하나하나에는 당대 소녀들이 감내해야 했던 이름 모를 상실감과 낭만적 갈망이 투영되어 있었고, 주인공의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타고 흐르는 유려한 곡선은 마치 누나가 현실에서 가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가는 가느다란 통로와도 같았다.


​누나는 옷 소매가 거뭇한 연필 가루로 오염되는 것조차 망각한 채, 종이 위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지우개 가루가 은하수처럼 흩뿌려진 그 좁다란 책상 위에서, 누나는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던 자유로운 영혼의 형상을 쉼 없이 길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가난이 숙명처럼 군림하던 전주의 어두운 만화방 구석에서, 한 소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벌이던 가장 고독하고도 찬란한 미적(美的) 투쟁이었다.

​나는 그 곁에서 박기당의 《비호(飛虎)》라는 거대한 신화(神話)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낡은 만화책의 갈변된 종이에서는 해묵은 먼지가 일었으나, 그 속에서 펼쳐지는 무협의 세계는 서슬 퍼런 검기(劍氣)로 가득 차 있었다. 주인공 비호가 장풍(掌風)을 날리며 악인들을 단죄할 때마다, 나의 심장 박동은 세차게 요동쳤다.

박기당 특유의 역동적인 필치로 그려진 검객들의 대결은 소년의 망막 위에서 실재하는 역사보다 더 생생한 진실로 전해졌다. 그것은 억눌린 현실을 돌파하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통쾌한 해방구였다.

​좁다란 만화방 창틈으로 스며든 비스듬한 저녁 햇살은,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입자들을 마치 은하수의 별들처럼 찬란하게 빛나게 했다. 우리는 그 고요한 밀실(密室) 안에서 각자의 서사에 매몰된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종이 위에 구현된 가공의 세계를 탐닉했다.

​때로는 만화방 주인이 끓여내는 라면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며 육체의 허기를 일깨웠으나, 우리 남매에게 그곳은 영혼의 허기를 채우는 장소였다. 1971년 전주의 그 작고 어두운 만화방은, 훗날 우리가 마주할 수많은 삶의 비극과 무협 같은 투쟁들을 견뎌내게 할 자양분을 남몰래 길러내던 안온한 자궁(子宮)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이제는 아득한 전설이 되어버린 1971년 전주의 오월.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누런 종이 냄새와 창틈을 타고 흐르던 금빛 먼지의 잔상으로 치환되어, 내 생의 진경산수(眞景山水)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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