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덕(望德) 장흥 고씨(長興 高氏)의 대서사

탐라에서 망덕까지 그리고 강물의 시간

by 고영주



망덕(望德)의 전상(全狀) — 장흥 고씨(長興 高氏)의 대서사


강물의 시간


​망덕(望德)이라는 두 글자 뒤에 첩첩이 쌓인 세월의 켜를 들추어보는 일은, 이제는 차가운 수면 아래 유폐된 한 시대의 영혼을 불러내는 처절한 초혼(招魂)의 의식과도 같다. 그곳은 지도상의 ‘용담호’나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가 아니라 대대손손 억척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이들의 자부심과 대자연의 준엄한 섭리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던, 하나의 완결된 우주였다.

​오늘날 ‘덕(德)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일컫는 망덕은 백제 시대에는 물거현(勿居縣)이라 불렸다. ‘물 거’란 한자의 뜻을 빌린 차자(借字) 일뿐, 그 본의는 정자천의 굽이치는 물줄기 속에 터를 잡은 ‘물가 마을’ 혹은 ‘물 가운데 땅’이라는 투박하고도 정직한 이름이었다.

고려 시대 용담현(龍潭縣)에 편입된 뒤에도, 이곳은 해마다 정자천이 범람하며 실어 나르는 기름진 흙과 강물을 터전 삼아 이어온 ‘물가의 삶’ 그 자체였다. 선사시대의 고인돌 18기와 돌널무덤들이 증언하듯, 이 땅의 생명력은 문자로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정자천의 물결을 따라 면면히 이어져 왔다.

탐라에서 망덕까지

​이 유구한 땅의 골격은 장흥 고씨(長興 高氏)들의 굳건한 뿌리 위에 세워졌다. 가문의 줄기는 멀리 탐라(耽羅)의 푸른 파도에서 시작되어 정자천에 이르기까지의 드라마틱한 유전(流轉)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본래 탐라의 주인들이었던 고씨 일족은 고려의 중앙집권화가 거세지자 조상의 혼이 깃든 한라산을 뒤로하고 남해의 물살에 몸을 실었다. 여러 척의 배는 전남 장흥에 닻을 내렸다.

​고려 말, 고복림(高福林)은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졌고, 후손들은 ‘장흥백파(長興伯派)’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평화는 임진년의 참화로 깨어졌다. 제봉(霽峰) 고경명 의병장은 금산 전투에서 아들 고인후와 함께 장렬히 순국하며 가문에 불멸의 충절을 안겼으나, 남은 가솔들에게 현실은 가혹했다. 종가는 화마에 잿더미가 되었고, 살아남은 형제들의 일부는 위패를 품고 험준한 산맥을 넘어 경남 산청(山淸)의 깊은 골짜기로 숨어들었다.

​고난의 행군

​산청의 험한 산자락에서 흙을 일구며 은둔한 지 이백여 년, 시대의 광풍은 다시금 가문을 흔들었다. 조정이 노론과 소론의 골육상쟁으로 얼룩진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가문의 기둥은 비정함 속에 목숨을 잃었다.

첫 닭이 울기 전, 어머니는 슬픔을 삼키며 어린 여섯 아들의 손을 잡고 길을 떠났다. “이 땅의 도(道)가 땅에 떨어졌으니, 새로운 복지(福지)를 찾아야 한다”는 비장한 결단이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압제의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찾아 나선 장엄한 서사와 닮아 있었다. 황매산의 척박한 능선을 넘고 관가의 서슬 퍼런 감시를 피해 거창의 가파른 고갯길을 지나는 행렬은, 파라오의 추격대를 피해 시나이 광야를 걷던 고난의 행군이었다. 발이 부르트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극한의 고행 끝에 덕유산의 거대한 장벽 육십령(六十嶺) 정상에 올랐을 때, 그들의 몰골은 만신창이였으나 눈빛만큼은 샛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진안 땅 정천 망덕에 들어선 순간, 기적처럼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천혜의 요새처럼 솟아오른 기암괴석 사이로 옥빛 정자천의 물줄기가 거대한 휘장을 두르듯 마을을 삼면으로 감싸 안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 굽이치는 강물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품어준 요단강의 물결처럼 성스러웠으며, 당쟁의 피바람과 광기 어린 시대의 칼날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성역과도 같았다. 이곳이야말로 가문의 도를 지켜내고 육 형제의 명맥을 이어갈 ‘은자의 가나안’ 임을 그들은 직감했다.

​벌담과 육 형제의 굴기(崛起)​

​가문은 망덕의 안동네인 ‘벌담’에 터를 잡았다. ‘벌담’은 정자천의 풍요로운 물줄기가 실어 나른 비옥한 흙이 쌓여 만들어진 ‘넓은 벌판(벌)’에 새로이 ‘담장(담)’을 세웠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척박한 산청의 기억을 뒤로하고 마주한 이 너른 들판은, 굶주린 육 형제를 먹여 살릴 ‘만나’가 쏟아지는 기적의 땅이었다. 삼면을 에워싼 강물은 천연의 해자가 되어주었고, 그 안쪽의 포근한 들판은 세상과 격리된 채 오직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최적의 안식처였다.

​여섯 아들은 낮이면 피땀으로 망덕의 땅을 일궈 개척의 역사를 썼고, 밤이 깊으면 정자천의 물소리를 압도하는 낭랑한 성독(聲讀)이 온 마을을 휘감았다. 그것은 단순한 공부가 아니라, 시대의 칼바람에 꺾이지 않겠다는 장흥백파의 기개 높은 함성이었다.

​그 정진의 결과는 찬란했다. 둘째 고제원은 통훈대부, 셋째 제하는 예조좌랑, 넷째 제용은 예조판서, 다섯째 제태는 통훈대부, 여섯째 제풍은 통정대부라는 관직에 올랐다.

이는 한 집안의 가풍이 어떻게 세속의 권위로 치환되는지를 보여주는 준엄한 증명이었다. 특히 넷째 제용이 오른 예조판서는 국가의 예악과 외교를 총괄하는 장관의 소임이니 그 위세가 대단했고, 여섯째 제풍의 통정대부는 임금과 국사를 논하는 당상관의 붉은 관복을 허락받은 자리였다. 형제들이 조정의 품계를 나누어 가졌으니, 가문의 긍지는 망덕의 들판마다 깊게 뿌리내려 이곳을 ‘은자들의 굳건한 왕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각성(各姓)의 연대

​망덕은 고씨들만의 성역에 머물지 않았다. ‘새담(땀)’의 양 씨, ‘복골’의 추 씨, ‘신촌’의 김 씨 등 여러 성씨가 어우러져 저마다의 삶을 수놓았다. 마을 끝에서 두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형세는 여러 성씨가 망덕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수렴되는 것을 상징했다. 장대비에 마을이 고립될 때마다 그들은 더욱 끈끈한 연대를 빚어냈고, 고립된 마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자 흔들리지 않는 성채가 되었다.

​이제 망덕의 사계는 아득한 전설이다. 봄이면 잔설이 녹아 논배미가 하늘을 담는 유리가 되었고, 여름이면 정자 그늘 평상 위로 바둑 두는 소리가 매미 울음에 씻겨 내려갔다. 가을의 황금빛 들판과 선연하게 붉은 감들, 그리고 순백의 눈꽃과 아궁이의 장작 연기는 마을을 감싸던 포근한 외투였다.

​그 모든 풍경은 이제 수면 아래에서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영면에 들었다. 비록 실체로서의 땅은 사라졌으나, 망덕의 그 시린 아름다움과 선조들의 숭고한 역사는 고향을 잃은 이들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아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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