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墨香)의 가계(家系)

강암 송성용과 부친, 그리고 조부

by 고영주


묵향(墨香)의 가계(家系)


​진안 정천 망덕(望德). 그곳은 호남의 지붕이라 불리는 진안고원의 서늘한 기운이 운장산의 험준한 줄기를 타고 내려와 잠시 숨을 고르는 땅이다.

사방이 거대한 산세에 가로막혀 있으되 결코 답답하지 않음은, 마을을 감싸 안은 산줄기가 마치 거친 바다를 해치고 나가는 거대한 배의 형국, 즉 행주형(行舟形)의 길지인 까닭이다. 풍수가 들은 말한다. 배가 무겁게 가라앉지 않고 순항하기 위해서는 돛이 굳건해야 하며, 그 안에는 사람을 살리는 무언가가 실려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였을까.


망덕의 품속에서 조부께서는 사람을 살리는 약향(藥香)과 정신을 맑게 하는 묵향(墨香)을 갈마들며 지켜왔다. 약방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쌉싸름한 약재 냄새는 마을 사람들의 고단한 육신을 달랬고, 사랑채 문창살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필묵 소리는 골짜기의 서늘한 공기를 고요히 잠재우곤 했다.

​장남인 부친은 태어나면서부터 가문의 명운이라는 무거운 돛을 짊어져야 할 숙명을 안게 되었다. 조부께서는 아버지가 속히 가문을 일으키고 대를 잇기를 바라는 마음에 전주 한성사범학교로 보내셨다. 아버지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고향의 교단에 섰으며, 스물하나의 젊은 나이에 면장의 딸이었던 아리따운 어머니와 혼인하여 이냐시오와 세실리아, 헬레나, 그리고 나를 낳았다.

​그러나 부친의 영혼은 교단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예술적 편향이 최종적으로 닻을 내린 곳은 당대 호남 서예의 최고봉이던 강암(剛菴) 선생이었다. 강암이라 하면 호남의 기걸한 기운을 붓 끝에 모아 예서와 행서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던 이로, 그 필력은 단순히 기술의 연마를 넘어 도(道)의 경지에 닿아 있었다.

호남 서예의 거대한 두 물줄기인 창암(蒼巖) 이삼만이 조선 후기 전주와 정읍의 산하를 소요하며 물 흐르듯 거침없는 유수체(流水體)의 격조를 일궈낸 자연의 화신이었다면, 그 예맥을 이은 현대의 거봉 강암(剛菴) 송성용은 전주의 묵향 깊은 뜨락에서 평생토록 서릿발 같은 절개와 담박한 선비의 기개를 지키며 붓끝으로 청풍(淸風)의 도를 세운 근세의 사표(師表)라 할 수 있다.


강암 선생과의 인연


부친은 봄바람이 산야를 물들일 때 분홍빛 진달래꽃을 한 포대 가득 짊어지고 선생을 찾았는데, 그것은 선생이 즐기신다는 두견주(杜鵑酒)의 향취를 빌려 당신의 비천한 재주를 일깨워달라는 지극한 예우였다. 참꽃 한 포대와 맞바꾼 선생의 글씨 한 장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아버지가 평생을 두고 해독해야 할 무구한 정신의 지도와도 같았다.

부친은 선생의 필체 속에 숨은 기운을 쫓아 수만 번의 임모(臨摹)를 거듭했다. 참꽃(진달래)이 지고 손마디에 굳은살이 박일 즈음이면 다시 계란 꾸러미를 들고 선생의 문턱을 넘었다. 강암 선생이 노년에 이르러 오른손이 불편해지자 왼손으로 붓을 잡아 기교를 넘어선 졸박(拙朴)한 '악필(握筆)'의 경지를 개척한 일은, 부친에게 글씨란 육신의 한계를 넘어 영혼으로 밀어 올리는 숭고한 투쟁임을 각인시킨 평생의 화두가 되었다.

서예의 도에서 임서는 세 가지 단계를 거치며 완성된다.
​첫째로 안목의 교만함을 내려놓고 필획의 형상과 결구의 미학을 몸에 각인시키는 형임(形臨)의 고단한 공력이 그 시작이다. 붓끝이 자유로워지면 겉모양을 넘어 종이 뒤편에 숨은 작가의 기개와 격정적인 필의를 마음으로 읽어내는 의임(意臨)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 두 번째. 법첩을 덮고도 그 오묘한 이치를 백지 위에 펼쳐내는 배임(背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옛것을 온전히 삼켜 자신만의 고유한 서풍을 세우는 화룡점정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조부 이야기


​조부께서는 진안군 일대에서 뛰어난 명필이자 한학의 거유(巨儒) 셨다. 조부의 필치는 기상이 높고 서권기(書卷氣)가 넘쳐흘러, 종이 위에 내려앉은 먹빛만으로도 보는 이의 정신을 번뜩이게 했다. 또한 언변은 막힘이 없으면서도 논리가 정연하여, 주위에서는 군의원이나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경륜을 펼쳐보라며 수차례 권유기도 했다.


그러나 조부께서는 허허로운 웃음으로 그 모든 제안을 물리치셨다. 정치의 부박함과 권력의 덧없음을 이미 꿰뚫어 본 이에게 세속의 명예란 붓 끝에 맺힌 한 방울의 먹물보다도 가벼운 것이었다.

장흥백파 23대손인 조부께서는 평생을 글씨와 학문에만 매진하며 선비의 절조를 지키셨으니, 그 결벽한 정신이야말로 아버지가 국전 추대작가와 심사위원의 반열에 오르면서도 결코 넘지 못했던 가장 높고 거대한 벽이었다.

​세월은 가혹하게도 조부의 오른손에 중풍이라는 쇠사슬을 채웠다. 아버지는 고향 망덕에 올 때마다 묵직한 단계연(端溪硯) 벼루와 화선지를 펼쳐놓으며 간곡히 독려했다.

"아버님, 강암 선생은 오른손이 불비(不備)해지자 가차 없이 왼손으로 붓을 잡아 악필의 경지를 여셨다 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다시금 붓을 들어보시지요."

하지만 평생 정제된 법도와 완벽한 미(美)를 추구해 온 조부에게, 통제되지 않는 왼손의 서툰 획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굴욕이었을지 모른다. 결국 조부는 고개를 저으며 붓을 꺾으셨고, 사랑채를 감돌던 묵향은 서늘한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 주인을 잃은 벼루와 붓은 가문의 법통을 잇지 못한 방백(傍白)처럼 자연스레 어린 나의 차지가 되었다.

​산야에 눈이 하얗게 내린 어느 해 입춘, 손이 불편한 조부께서는 4학년이던 내게 입춘방을 쓰라 하셨다. 나는 숨을 참으며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을 정자체로 바르게 써 내려갔다. 글씨를 잠시 응시하던 조부께서 말씀하셨다.

"제법 잘 썼구나. 하지만 봄이 와서 경사가 가득하기를 바라는 글귀에 어찌 그리 날 선 기운이 들어가 있느냐. 무릇 글씨란 그 글이 품은 뜻과 같아야 하거늘, 입춘첩이라면 모름지기 얼어붙은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순처럼 생동(生動)하는 표정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은 단순히 서법의 교정을 넘어, 삶의 순리는 억지로 짓누르는 힘이 아니라 계절의 변화처럼 유연한 흐름에 있다는 조부의 인생론이었다.

​부친은 가문의 이 면면한 묵향이 장남인 이냐시오에게 이어지길 바라셨다. 붓을 쥐는 법부터 획에 담긴 음양의 조화까지 당신이 익힌 모든 정성을 전수하려 애쓰셨다. 그러나 아들의 눈은 검은 먹물 너머의 세상, 더 넓은 학문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부친은 아들의 손에 들린 두꺼운 서적들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곤 하셨다. 그것은 대를 이어온 예도(藝道)가 끊기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아니면 당신이 그랬듯 가문의 무게를 짊어지느라 꿈을 억눌러야 했던 장남의 비애를 아들만은 피하기를 바라는 안도감이었을까.

​이제 정천 망덕의 한약방도, 강암을 찾아가던 진달래꽃 길도 아스라한 추억의 저편으로 저물었다. 할아버지의 마비된 손끝에서 멈춘 붓과 아버지의 고집스러운 임모, 그리고 학문의 길로 떠난 형의 뒷모습. 그 엇갈린 선택들 사이로 여전히 코끝을 감도는 것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그 지독하고도 고귀한 묵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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