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선생님'과 '빨갱이'

1971년부터 1987년까지 김대중 죽이기

by 고영주


김대중, '선생님'과 '빨갱이'

김대중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시대의 사표(師表)로 받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편 기득권의 성벽 안에서는 그를 '빨갱이'나 '지역감정의 주범', '대통령병 환자'라는 낙인 속에 가두려는 거대한 장벽이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이냐시오 형이 태어났던 1957년, 훗날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이 될 한 남자가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이름은 김대중. 그의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였다. 세례를 집전한 신부는 그에게 “토머스 모어처럼 신앙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 되라”는 축원을 건넸다 하니, 그것은 축복이라기보다 가혹한 예언에 가까웠다.

​그의 삶은 정녕 ‘인동초(忍冬草)’의 그것이었다. 모진 눈보라와 혹한의 계절을 뿌리로 견뎌내고서야 비로소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끈질긴 생명력, 그러나 그 꽃을 피우기까지 그가 감내해야 했던 세월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뜨겁고도 치욕적인 상흔과 맞닿아 있었다.

​국가라는 이름의 거대한 폭력


​한국 정치사에서 ‘김대중’이라는 이름만큼 증오와 숭배의 극단을 오간 단어가 또 있을까.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시대의 등불로 받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그를 ‘빨갱이’와 ‘지역감정의 주범’이라는 주홍글씨 속에 가두려는 견고한 성벽이 있었다. 특히 기득권의 세계에서 ‘김대중 죽이기’는 일종의 신분 상승을 위한 면허증이었다. “그를 잡거나 괴롭히기만 해도 출세가 보장되던 시절이었다”라는 한 정보기관 간부의 고백은, 당시의 권력이 한 개인을 얼마나 조직적이고 집요하게 파괴하려 했는지를 증언하는 서늘한 삽화다.


​그 잔혹한 사냥의 서막은 내가 동국민학교 1학년이던 1971년 대선이었다. 당시의 선거는 후보 대 후보의 대결이 아니라, 김대중이라는 한 개인과 중앙정보부를 필두로 한 국가 권력 전체와의 전쟁이었다. 그가 공약을 발표할 때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간첩 사건이 터져 나왔고, 국방부 장관은 그의 공약을 ‘이적행위’라 몰아세웠다. 비록 석연치 않은 개표 과정 끝에 박정희에게 패배했으나, 그가 보여준 잠재력은 영남 패권주의자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그 공포는 곧바로 물리적인 제거를 향한 광기로 변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오다


​1971년부터 1987년까지, 그의 인생은 칠흑 같은 암흑기였다. 6년의 투옥과 10년의 가택연금, 그리고 55회에 달하는 감금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죽음의 그림자는 14톤 덤프트럭의 형상으로 찾아왔다.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 온 그 육중한 쇳덩이는 그의 골반을 바스러뜨렸고,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73년 도쿄의 한 호텔에서 벌어진 납치 사건은 차라리 한 편의 첩보 소설에 가까웠다. 대한해협의 검은 파도 속에 수장될 뻔했던 그는 미국의 개입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훗날 국정원 과거사위는 이 사건에 박정희의 묵시적 승인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죽음은 다시 1980년 신군부의 이름으로 찾아왔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배후 조종했다는 해괴한 올가미가 씌워졌고, 군사재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보수 언론의 필치는 잔인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그를 감형해 준 전두환의 결단을 두고 “뉘우치는 자에게 용서를 베푸는 차원 높은 다스림”이라 칭송하며, 피해자를 오히려 ‘죄인’으로 낙인찍는 가해자의 논리를 설파했다. 세계적인 구명운동 끝에 그는 미국 망명길에 올랐지만, 조국은 그를 ‘용서받은 범법자’로 규정했다.


​낙인과 굴레, 그리고 지역주의의 덫


​그를 평생 따라다닌 가장 고통스러운 굴레는 사상적 낙인이었다. 독재에 항거하고 통일을 꿈꾸는 모든 행위는 ‘용공(容共)’이라는 편리한 프레임 안에 갇혔다. 선거철마다 언론은 ‘북풍(北風)’을 일으켰고, 안기부는 공작을 통해 그를 김정일의 자금을 받는 인물로 둔갑시켰다. ‘동지’나 ‘민중’ 같은 평범한 단어조차 그가 빨갱이라는 증거가 되었고, 아태재단이라는 이름마저 북한의 기구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매도당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남로당 전력에는 침묵하던 언론들이, 김대중에게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상의 붉은색’을 덧칠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그 기만적인 풍경. 심지어 학교 교사들조차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국가적 교육을 받아야 했던 그 시대는, 한 인간의 인격을 파괴하기 위해 국가가 얼마나 거대한 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혹한 사례였다.


​지역감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정권이 권력 유지를 위해 배양한 지역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가 김대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언론은 오히려 그를 지역감정의 주범으로 몰아세우는 적반하장의 논리를 폈다. 비자금 문제에 대한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며 그의 생애를 폄훼하려 했던 시도들은, 그가 이룬 국가적 성취보다 그가 남긴 ‘갈등의 상처’만을 부각하려 애썼다.


​김대중, 그는 진정 한국 현대사가 낳은 가장 거대한 인동초였다. 그를 죽이려 했던 수많은 시도와 억압 속에서도 그는 기어이 겨울을 견뎌냈고, 자신을 핍박했던 이들을 향해 화해와 용서라는 이름의 꽃을 피워냈다. 그것은 토머스 모어가 꿈꿨던 유토피아에 닿으려 했던 한 정치인의 가혹하고도 숭고한 투쟁의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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