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유년의 초상

by 고영주


1971년, 유기된 유년의 기록

​모든 비극은 예고 없이 당도하나, 그 흔적은 생의 전반을 관통하며 지독한 화인(火印)을 남긴다. 1971년의 여름. 우리를 태우고 무채색의 풍경을 가르며 달리던 삼용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안온했던 과거로부터 우리를 영구히 격리하는 단절의 도구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낯선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 무렵, 차창 너머로 명멸하던 거리의 소음이 잦아들고 삼용차는 구로동의 어느 퇴락한 집 앞에 육중한 몸체를 멈추었다.


어른들은 분주히 이삿짐을 나르며 생의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나, 여덟 살배기 소년의 눈에 비친 그곳은 문명의 온기가 닿지 않는 지도의 끝자락처럼 황량하고도 이질적이었다.


​그 시절의 구로동은 오늘날의 마천루가 뿜어내는 위용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야트막한 단층 주택들과 그 사이사이를 헐겁게 메우고 있는 거친 흙바닥의 공터들뿐이었으니, 그 빈터마다 주인 없는 잡풀들이 서걱거리며 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그 생경한 간판들과 흙먼지 자욱한 거리의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주거의 공간을 옮기는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내가 그간 안온하게 구축해 온 세계의 경계가 무참히 붕괴되고 전혀 이질적인 삶의 공간으로 편입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더 가혹한 사실은 아버지는 하룻밤을 지낸 후 홀연히 종적을 감추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닥쳐올 고난의 무게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구로동의 밤을 채우는 것은 오직 어머니의 깊고도 무거운 한숨뿐이었다. 그 한숨 소리는 전조(前조)도 없이 들이닥칠 빈곤의 서곡이었으며, 아무리 시선을 뻗어보아도 가냘픈 빛줄기조차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심연이었다.


​그 유기(遺棄)의 상처는 유년의 영혼에 결코 회복되지 않을 생의 흉터를 깊게 아로새겼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 육신에 이미 새겨져 있던 불의 낙인, 그 고통스러운 화인(火印)과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전주의 노송동 시절, 어느 날 나를 덮쳤던 그 뜨거운 물의 기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살갗을 파고들던 그 가차 없는 열기는 육신의 비명을 자아냈고, 그 자리의 지워지지 않는 흉터는 나의 유년이 결코 매끄럽지 않을 수 있음을 일찌감치 예고하고 있었다.


육신의 화상은 붉은 흉터로 남았으나, 구로동의 화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의 내면을 짓무르게 했다. '왜 나는 버려졌는가'라는 자문은 전주의 그 뜨거운 물보다 더 지독하게 나의 자존을 짓밟았고, '지켜질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자책은 화상 입은 자리가 아물며 돋아나는 새살처럼 나의 인격 밑바닥에 딱딱한 굳은살로 자리 잡았다.


구로동 그 집에서 나는 어머니의 한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유년의 꿈을 하나둘씩 지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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