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도화선이 된 '버려진 자들의 도시'

1971년 8월, 서울의 화려함 뒤에 가려졌던 핏빛 기록

by 고영주


​8월의 아스팔트는 왜 피를 갈구했나

단 6시간의 폭동, 그러나 그 짧은 광기는 훗날 '유신'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깨우는 결정적인 신호탄이었다. 지옥의 열기보다 뜨거웠던 1971년 8월의 아스팔트 위에는, 승리에 취한 권력의 비명과 굶주린 민초들의 분노가 뒤엉킨 괴기스러운 전조가 흐르고 있었다.


​그해 5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간신히 승리를 거머쥔 박정희 정권은 승리의 고취감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턱밑까지 차오른 위기감에 몸을 떨고 있었다. 김대중이라는 신진 정적이 몰고 온 거센 바람은 노회한 권력의 뿌리를 뒤흔들기에 충분했고, 체제의 균열은 이미 도처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감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이 가장 비극적이고도 노골적인 형해를 드러낸 사건, 그것이 바로 8월 10일의 광주대단지사건이다.


​당시 서울시는 도시 정비라는 미명 아래 청계천 일대의 빈민들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현재의 성남시 일대)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대대적인 '성(城) 밖 내몰기'를 감행했다. 그것은 근대화라는 거창한 구호 아래 가려진, 국가 권력의 폭력적 행정 편의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아무런 기반 시설도 없는 황무지에 던져진 수만 명의 민초들은 천막 한 장에 의지해 생을 연명해야 했다.


​기다림은 길었으나 약속된 일자리와 분양증은 오지 않았고, 가혹한 투기와 과세만이 그들의 목을 조였다. 마침내 8월 10일,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5만여 명의 이주민은 폭발했다. 그들은 '배고파서 못 살겠다'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무서운 구호를 내걸고 관공서를 습격하며 거리를 점거했다. 그것은 세련된 민주주의의 수사(修辭)를 입은 정치 투쟁이 아니었다. 벼랑 끝으로 밀려난 자들이 본능적으로 내뱉은, 생존이라는 가느다란 끈을 놓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자 야수적인 비명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집권층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안겨주었다. 학생과 지식인들의 민주화 요구는 논리와 명분으로 대항할 수 있었으나, 굶주린 군중의 폭발적 에너지는 통제 불능의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 빈민층의 저항은 단순히 경제적 문제를 넘어, 정권의 정당성을 뿌리부터 부정하는 거대한 파도로 번질 기세였다.


​사태는 서울시의 양보로 일단락되는 듯 보였으나, 권력의 내면에서는 이미 '비상(非常)'한 결단이 싹트고 있었다. 대중의 불만을 민주적 절차로 수렴하기에는 체제가 너무도 경직되어 있었고,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유지할 확신 또한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광주대단지사건에서 노출된 민중의 저항과 1971년 선거에서의 위기감은 박정희 정부로 하여금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강력한 일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게 하는 결정적인 촉매제가 되었다. 권력은 대중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보다, 물리적인 강압과 헌정 질서의 파괴를 통해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길을 택했다.


​1971년 12월의 '국가보위법' 제정과 이듬해인 1972년 10월 17일, 탱크를 앞세워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킨 '시월유신(十月維新)'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광주의 황량한 벌판에서 터져 나온 빈민들의 절규를 잠재우고, 체제의 위협 요소를 영구히 제거하려는 권력의 극단적인 자기 방어 기제였다.


​결국, 1971년의 구로동 흙먼지 속에서 우리 가족이 마주해야 했던 그 황량함과 어머니의 깊은 한숨은 단순히 한 가정의 불행이 아니었다. 거대한 시대의 조류가 유신이라는 암울한 동토(凍土)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리는, 우리 민족 전체가 감내해야 했던 예보(豫報)였던 셈이다. 그해 팔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민주주의의 꿈은 잠시 유예되었고, 한반도는 길고 긴 긴장의 터널 속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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