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비극은 지나치게 맑은 영혼이 탁한 세상을 견디지 못해 발생한다.
세상의 모든 비극은 대개 결핍에서 시작되지만, 어떤 비극은 지나치게 맑은 영혼이 탁한 세상을 견디지 못해 발생하기도 한다.
위다의 고전 <플란다스의 개>가 우리에게 남긴 시린 잔상은 바로 후자에 속한다. 가난한 우유 배달 소년 네로와 늙은 개 파트라슈. 그들이 벨기에의 살벌한 겨울바람 속에서 맞이한 종말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비정한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마지막 망명이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실로 단출하면서도 엄숙하다. 늙은 할아버지와 함께 우유 수레를 끌며 하루를 연명하던 네로는, 주인에게 혹사당하다 길가에 버려진 파트라슈를 거두어 가족으로 삼는다. 그러나 운명은 이 갸륵한 동거를 축복하지 않았다. 유일한 기둥이던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마을 사람들의 비정한 오해와 방화범이라는 누명은 어린 소년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다. 성탄 전야, 네로는 그토록 갈구하던 루벤스의 성화 앞에서 파트라슈를 품에 안은 채 차가운 설원 위의 성자가 되어 영면한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이미지는 명확하다. 그것은 순수함이 악의(惡意) 없는 다수의 무관심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주는 가혹한 증명이다. 우리는 주인공 네로를 단순한 불우아동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비루한 생존보다는 예술적 숭고함을, 타협보다는 도덕적 결백을 선택한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다. 그 곁을 지킨 파트라슈 또한 개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인간의 양심이자, 배신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치 않는 신의(信義)의 상징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여기서 우리는 '유기(遺棄)'라는 단어의 비정한 속성과 마주하게 된다. 파트라슈는 쓸모가 다했다는 이유로 길가에 버려졌고, 네로는 공동체의 온정으로부터 유기되었다. 현대의 유기견 문제 역시 본질은 다르지 않다. 생명을 도구로 여기는 오만함과 책임 없는 방종이 파트라슈를 만들고 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나의 유년 또한 그 유기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전주 인후동의 낯익은 풍경을 등지고, 연고도 없는 구로동의 낯선 골목 끝으로 밀려나듯 버려졌던 1971년의 그 엄혹했던 여름을 기억한다. 우리는 때로 시대의 파도에 밀려 본의 아니게 삶의 자리를 유기당하곤 했다.
어린 시절 구로동의 매캐한 매연 속에서 느꼈을 그 막막한 소외감은, 어쩌면 안트베르펜 성당 바닥에 누워있던 네로의 외로움과 한 뿌리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짐승이 내지르는 소음 속에서, 보호받지 못한 채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던 그 시절의 소년들은 모두 저마다의 파트라슈를 가슴에 품고 있었으리라.
결국 <플란다스의 개>는 버려진 존재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완성한 지독하게 아름다운 구원의 기록이다. 내가 지나온 구로동과 망덕의 시간들도, 돌아보면 유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고통스러운 성장의 마디였음을 깨닫는다. 네로와 파트라슈가 눈을 감으며 비로소 천상의 빛을 마주했듯, 우리의 시렸던 유년 또한 이제는 기록이라는 따뜻한 품 안에서 비로소 안식을 찾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