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신당 한약방

도착한 '유배지'는 어린 왕자의 사막과 닮아있다.

by 고영주


그날의 일기는 묵직한 사명 하나를 남긴 채 끝을 맺고 있었다. 그 서약은 암울한 시대에 맞선 한 인간의 고결한 지조였으며, 조상 대대로 일궈온 학문의 토양 위에 활인(活人)의 꽃을 피워낸 사랑이었다.




1982년, 신흥고 교정에 여전히 시린 칼바람을 뿌리던 겨울의 끝이었다. 입시의 중압감에 짓눌려 있던 내게,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비보는 마치 세상의 한 축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매우 슬퍼하며 할아버지를 뒷동산의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나는 벽장 깊숙한 곳에서 먼지 수북하게 쌓인 오동나무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늘 금성라디오 옆을 지키며 가계부와 마을 대소사의 기록을 남기시던 할아버지의 유품 상자 안에는 묵향 머금은 지필묵 도구들과 보자기에 싸인 낡은 일기장 열두 권이 담겨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단순한 가계부라 보기엔 그 존재감이 자못 묵직했다. 조심스레 첫 장을 들추자 세월을 비껴간 듯 정갈하고 곧은 조부의 필체가 선명하게 살아났다.

​경진년 사월 스물 닷새. 산천은 어느덧 눈부신 봄의 한복판에 와 있다. 뒷동산의 산벚나무는 연분홍 꽃화관을 만발하게 피워 올렸고, 꽃잎들은 봄바람에 실려 남신당의 처마 끝을 어지러이 스쳐 간다. 일제의 압제가 극에 달하여 창씨개명 강요와 국가총동원법 등으로 민족의 혼을 말살하는 것도 모자라 전통의학을 멸시하니 개탄스럽기 한이 없다. 그 가운데서도 자연은 생명의 절정을 노래하고 있으니, 오히려 서러운 봄날이다.

​지나온 삼 년의 세월이 참으로 아득하다. 그것은 단순히 자격 하나를 얻기 위한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차디찬 등잔불 아래서 나 자신을 깎아내고 가문의 명운을 지탱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해 온 고행의 여정이었다. 시험장의 삼엄하고도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붓을 놀리던 떨림과, 갓 태어난 아들 권석의 울음소리를 뒤로하며 본초강목을 넘기던 숱한 밤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마침내 내 집 문 앞에 ‘남신당(南信堂)’이라는 간판을 내거니, 가슴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치밀어 오른다. 남(南)은 만물이 생동하고 태양의 정기가 가장 성한 방위이다. 그 따스한 기운처럼 병든 이들의 몸을 덥히고, 신信)은 신의로써 약을 짓겠다는 스스로의 맹세다. 이 소박한 약방은 이제 망덕 마을 사람들과 근동 사람들의 고통을 보듬는 생명의 거처가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간판을 걸기까지의 삼 년은 오로지 인내와 헌신으로 일궈낸 시간이었다. 공부를 시작하며 백 번을 참는다는 ‘백인(百忍)’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지 않았던가. 일제의 전시 공출로 놋그릇 하나까지 내어주고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시절에 나는 아들 권석(權錫)의 이름을 지으며 아비로서의 무거운 책무를 통감했고, 스스로를 등잔불 아래 유폐했다.


​《동의보감》과 《본초강목》을 탐독한 뒤, 《방약합편》의 460여 처방을 통째로 외우기 위해 밤마다 처방 이름을 노래처럼 불렀다. "인삼미감보원기"로 시작하는 약성가가 입술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붓을 놀리며 가상의 처방전을 적고 또 적었다. 약재를 살 형편이 못 되어 산천을 돌며 직접 캔 뿌리들을 씹으며 그 맛과 기운을 몸에 새겼다. 유교 경전에서 배운 문리가 의서의 심오한 뜻과 맞닿아 터질 때의 희열은, 지독한 허기와 시대의 불안마저 잊게 할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그 고독한 정진의 시간 동안, 아내 병정은 진그늘에서 시집온 이후 한 번도 친정 발길을 하지 못한 채 나의 그림자가 되어주었다. 착하고 순한 성정이었으나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집념만큼은 쇠심줄만큼이나 질긴 아내였다. 내가 의서의 수만 가지 약재 향기에 취해 있을 때, 아내는 권석을 돌보며 밭농사에 매달렸다.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아내의 거친 손마디를 잡고 흐르던 눈물은 그간의 고단함을 씻어내는 정화의 눈물이었다.


​전북도청 특별시험장까지 새벽밥을 먹고 걸어가서 마주했던 그 긴박했던 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험장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시험의 첫 문항이 여전히 눈앞에 선하다.




'기혈이 모두 쇠하여 사지가 차갑고 맥이 미약한 환자가 내방하였을 때, 《방약합편》의 어느 통(統)에서 처방을 찾을 것이며, 그 주방(主方)과 가감법을 기술하라.'

​나는 주저 없이 상통(上統)의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을 적어 내려갔다. "기(氣)를 보하는 사군자탕과 혈(血)을 보하는 사물탕에 황기와 육계를 더하여, 무너진 몸의 근간을 세워야 한다"라고 답했다.


실기 시간에 ​시관이 내민 것은 검푸른 빛을 띠는 생부자(生附子)였다. 죽어가는 양기를 살리는 명약이나, 단 한 치의 오차만으로도 사람의 숨을 끊을 수 있는 맹독. 나는 그 서늘한 독기 너머로 생강과 감초의 온기를 입혀 독을 다스려야 하는 본초강목의 내용을 알고 있던 터라 혀끝에 감도는 마비감을 느끼며 진본을 가려냈다.


​일기장 갈피마다 묻어있는 것은 향기로운 묵향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붓끝으로 세상을 논하던 문(文)의 정신을, 뜨거운 부자(附子) 한 점으로 식어가는 생명을 데우는 의(醫)의 치유로 승화시키기 위해 견뎌낸 인고의 시간이었다. 독을 씻어내고 약성을 남기는 법제의 과정은 곧 조부께서 스스로를 단련하던 수양의 과정이었다. 일기는 계속되었다.


일 년 전 진안군 휘호대회에서 초서(草書)로 대상을 받았고 ​군수 박재섭(朴在燮)과의 인연은 그 묵연(墨緣)에서 시작되었다. 대회 당일, 수많은 선비의 필적 사이에서 나의 초서를 한참이나 응시하던 그는, 시상식이 끝나자 정중히 다가와 내 손을 잡았었다. "군자 신기독야(君子 愼其獨也)라 하였거늘, 아무도 보지 않는 독처(獨處)에서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며 붓을 들었기에 이토록 기운이 생동하는가"라며 묻던 그의 눈빛은 단순한 관료의 것이 아닌, 도(道)를 숭상하는 문사의 그것이었다.


​그 인연이 이어져, 남신당(南信堂) 한약방 현판식을 겸한 축하 잔치에 박 군수가 정천면장과 함께 직접 망덕까지 발걸음을 해주었다. 없는 살림이었으나 아끼던 돼지 한 마리를 잡고 막걸리와 떡을 넉넉히 쪄내어 동네 사람들을 대접했다.


​분홍 벚꽃이 막걸리 사발 위로 내려앉던 그때 박 군수는 내 손을 잡고 단상에 올라 말했다.
"이 험난한 시국에 망덕에서 이런 인재가 났으니, 이는 우리 정천면을 너머 진안군 전체의 경사요, 예향의 자존심을 세운 일입니다."


진그늘 장인어르신의 박수와 ​부친을 위시한 종친들의 웃음소리, 권석을 품에 안은 아내 병정, 아우 재헌과 사촌 봉기와 재희가 축하해 주었다. 흐드러진 봄 꽃과 어우러진 오늘의 풍경은, 내 생에 잊을 수 없는 춘몽(春夢)이라 말할 수 있다..


​아들 권석에게는 부끄럽지 않은 아비가 되고, 아내 병정에게는 삼 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은 남편의 이름을 되찾아 주리라. 동생 재헌과 두 여동생에게는 장자로서 흔들리지 않는 버팀목이 되며, 나아가 병마에 지친 이들에게는 햇살 같은 치유를 전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땅에 '남신당'을 세운 연유이자, 내 삶의 유일한 소명이다.


그날의 일기는 거기서 끝을 맺고 있었다. 조부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가족의 생계만이 아니라 엄혹한 시대에 맞선 한 인간의 고결한 지조였으며, 조상 대대로 일궈온 학문의 토양 위에 활인(活人)의 꽃을 피워낸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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