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녀와 졸부 7화

by 예나

예주는 어둠 속에서 혼자 교복을 입고 서 있었다.

정체불명의 목소리들이 예주를 비난했다. 여러 개 손들이 예주를 가리키고 있었다.

“미친 거 아니야?”

“야 너 진짜 나 좋아해?”


‘아니야...’

예주는 해명하려 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니 친구라는 애가 다 말해줬는데!”

목소리들은 하나로 합쳐졌다.

“하여튼 너... 소름끼쳐.”


예주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옆에 탁자에 있던 물을 한 입 들이키고는 거실로 향했다.

거실은 통창 유리로 비친 햇살로 눈부시게 그 자태를 보이고 있었다.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그녀의 부친이 링겔을 꽂은 채 병상에 누워있었다.

“아빠...”

예주는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말했다.

“제가 대신 해낼게요. 전부 제게 맡기세요.“


-



서윤은 잘리자마자 노동청에 가 직장내 괴롭힘을 신고했다. 그러나 노동청 감사관이 이렇게 말했었다.

“증거 있어요?“

”네? 증거요?“

“네, 민원인님 진술만으로 제가 어떻게 그 분들을 조사시킵니까.”

”아, 그게...“

”녹음한 거 없어요?“

“그게 갑자기 당한 거라...”

“증거가 없으면 저희도 손 못 써요. 그때 민원인 분께서 말한 사람들도 여기 왔었어요. 근데 둘이 말이 달라. 그럼 저흰 어떻게 해야겠어요?”

냉랭한 어조에 서윤은 기가 팍 죽었다.

”그 사람들이 여기 왔었어요?“

”네. 과장, 팀장이라는 분 둘 다요. 그런 거 없었다고 하고. 그리고 제출하신 채팅 캡처본... 이것도 이 정도로는 직장내 성희롱 성립 안 돼요.“

“그런..!”

“또, 권고사직이면 애초에 해고수당 신고도 못하고요. 권고사직 맞기는 했어요? 자진퇴사 처리 되어 있던데. 아무튼 이런 식으로 자필로 권고사직, 자진퇴사 이런 거 다음부터는, 쯧, 이렇게 적지 마요.”

서윤은 감사관의 단호한 태도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그 분위기가 서윤을 짓눌렀다.

“알겠습니다. 안 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죠...“


서윤은 고용노동청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통화 중이었다.

“응, 엄마.“

”어떻게 됐어? 직장내 괴롭힘 인정받았어?“

”응, 그게... 잘 안 됐어.“

”어이구, 어쩜 좋아. 우리 딸, 고생 너무 많았는데... 그 나쁜 것들. 에휴, 서윤이 너 괜찮아?”

“응, 나 괜찮아.”

“그래, 밥 잘 먹고 다니고! 이번 달은 용돈 보내줄게.”

“고마워, 엄마.”

전화를 끊자마자 한숨만 나왔다.

“이제 뭐 먹고 사냐.“

서윤은 담배를 피지 않지만 담배라도 피고 싶은 심정이었다.

휴대폰을 보니 지금은 알림이 0개였다. 외로웠다.

서윤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태주나 지운이 아닌, 다름아닌 예주에게 톡을 보내게 됐다.

‘예주 씨 뭐하고 지내? 잘 지내?’

서윤은 휴대폰을 든 손을 내리고는 혼자 헛웃음을 지었다. 나 뭐하는 거냐, 그만둔 직장 후임에게 질척거리기나 하고.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띠링!

서윤은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예주였다.

’주임님~ 오랜만이예요. 잘 지내셨어요?‘

’예주 씨, 나 이제 주임 아니잖아. 마음 내키는 대로 불러. 나 잘 지내지.‘

’음 그럼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언니라, 서윤은 훗 하고 웃었다. 천하의 금수저 예주에게 그렇게 불리는 기분이 마냥 나쁘지 않았다.



-


하이팰리스 7층 전시장 한 쪽. 주말임에도 인적이 한산했다.

은은한 조명이 캔버스를 비추고 있었다. 그 앞에 예주가 있었다.

그녀는 작품 설명을 상세히 읽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또 만났네, 백예주.”


낯설지 않은 낮은 음성. 돌아보자, 완벽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넓은 어깨, 태연한 미소, 그리고 누구라도 한 번쯤은 시선을 빼앗길 만한 눈빛.

하지만 예주의 표정은 순간 굳어졌다.



“…박지운.”


그 이름을 뱉는 순간, 속에서부터 싸늘한 기운이 치밀어올랐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우연히 마주친 옛 지인 정도로 보이겠지만, 예주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단짝친구가 찾아와 눈시울을 붉히던 장면이 선명했다.

‘걔들에게 당했어. ....거기에 박지운도 있었어.’

그때의 분노가 예주에게는 아직 남아있었다.


“왜 여기 있어?” 예주는 냉정하게 물었다.


지운은 마치 그런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듯,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왜긴. 나도 초대받았으니까 온 거지. 오해하지 마. 난 이제 그런 애 아니야.”


“오해?” 예주가 웃음기 섞인 비웃음을 흘렸다. “애가 감금당해서 정신을 못 차렸다는데, 오해라.”


지운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곧, 교묘하게 억울한 듯한 미소로 바뀌었다.

“네가 아는 건… 반쯤만 맞아. 솔직히, 내가 그 무리에 있던 건 사실이야. 근데 중심은 나 아니었어. 그냥 휩쓸린 거지. 그땐 어렸고—”


“어렸고, 실수였다고? 그 말 수백 번은 들어봤다.” 예주는 차갑게 잘랐다.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운은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한 걸음 다가서며, 낮게 속삭였다.

“그래도 지금의 난 달라. 네가 믿든 말든.”


그 순간, 예주는 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겉보기엔 완벽한 미남, 사교계에서 모두가 칭찬하는 금수저. 하지만 예주에게 그는 친구를 괴롭혔던 한심한 한량이었다.


지운이 말했다.

“서윤 씨랑은 요즘 어때?”

“아, 서윤 언니?”

지운은 혀를 내둘렀다.

“이제는 언니라고 부르는 사이야?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대단한걸.”

”친해지기까지 너무 오래걸렸어. 한 한달?“

”그렇군. 나한테는 이렇게 매몰찬 여자가 말이야.“

”지금 너랑 말 섞어주고 있는데 뭐가 매몰차다는 거야?“

”예전에 우리 어머니께서 농담으로 약혼 얘기 하셨을 때, 너 어떻게 나왔더라?“

예주가 말했다.

”아. 그때.“


예주는 지난 해 입주민 파티를 떠올렸다. 그때도 화려한 조명 아래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부유함에 축배를 들고 있었다.

예주에게 지운의 어머니 영미가 찾아왔다.

‘예주야, 우리 지운이랑은 어떠니? 약혼이라던가, 꺄르륵!’


당시에 예주는 비틀린 얼굴로 영미의 제안 아닌 제안에 응수했었다. 영미는 떨떠름한 표정을 했더가 애써 미소를 다시 지어보이며 대화를 마무리했었다.


지운이 말했다.

“그 표정, 정말 민망했었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상처였달까?”

“상처는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래서, 그 ‘서윤 언니’랑은 이번 주말에도 같이 놀기로 한 건가? 오늘? 아니면 내일인가.”

“내가 그걸 너한테 왜 말하겠니, 후후.”

“서로 친하게 지내서 안 좋을 것 없잖아, 백예주. 한 사람이라도 누군가 갈망하는 건 다름 아닌 바로 너일텐데?”


예주는 그 말에 순간 가슴이 저릿했다. ‘사람에 고프다’는 표현은, 바로 그녀 자신의 공허한 실체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주는 티 한 점 내지 않은 채, 무심한 듯 시선을 비껴 흘렸다.


그렇다면 서윤은 내게 뭘까, 예주는 어느새 생각에 잠겼다. 서윤 자신은 모르는 것 같지만 그에게는 태주에게서 보이지 않는 품위가 느껴졌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하던 굽히지 않던 눈빛.

갈색 긴 생머리, 호리호리한 몸매도, 인기 많을 것 같아 동경하는 면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서윤 앞에서는 왠지 모르겠지만 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도 무장 해제 될까 걱정했던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예주는 지운의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백예주. 어렸을 때랑 전혀 딴판으로 자랐는데, 이런 걸 보면 백예주 너 맞아.“


날 얼마나 안다고, 예주는 눈살이 찌푸려지려 했다. 중학교 때 예주가 과체중에서 비만을 왔다 갔다 하는 아웃사이더였다면 지운은 팬걸들을 거느린 왕자님 같은 존재였다. 둘은 서로 말을 섞을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그런데 외모가 바뀌어서인지, 집안 재산 규모를 어떻게든 알아낸 것인지, 예주가 성인이 된 후로 지운은 예주 곁을 맴돌아왔다. 지금은 그 대상이 서윤 위주로 바뀐 데에 예주는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아. 그러셔-.”

“그래. 너 툭하면 혼자 무슨 생각을 막 했잖아. 혼자서 자리에서 중얼거리기도 하고. 그리고...”

지운은 혼자서 말하기를 그만뒀다.

“그리고 뭐?”

예주의 물음에 지운은 씨익 웃었다.

“그러고보니 너 아직 여자 좋아하나?”

“그딴 건 오해였어.”

예주는 딱 잘라 말했다.

“오해? 재밌네. 당한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 안 하던데~”

”당하긴 뭘 당해. 걔는 착각이 심한 애였어.”

“너 말이야, 제대로 고민해봐. 정말 네 성정체성이 뭔지.”

예주는 아무 대답 없이 지운을 똑바로 쳐다봤다. 쳐다보고 또 쳐다봤다. 그 눈빛은 결코 호의적인 뜻이 아니었다. 지운이 말했다.

“왜 그렇게 보고 그래?“

예주는 눈을 크게 뜬 무표정으로 태주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10초가 20초가 되고 30초가 넘어가던 때에 지운은 예주의 적의감을 못 견뎌냈다.

”내가 그렇게 매력 있었나? 설마 옛날과 생각이 달라졌다던가.”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도 모르지?”

”...“

“그냥, 지금 가주는 거 어때?”

예주의 진지한 표정에 지운은 피식 웃어보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도 예주의 얼굴에서 냉랭함이 가시지 않았다.


-


서윤은 컴퓨터 화면 앞에서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모니터 빛이 푸석한 얼굴을 하얗게 비췄다. 취업 사이트 첫 화면엔 ‘2025 상반기 채용 공고 모음’이라는 문구가 반짝였지만, 그녀의 눈에는 한 줄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우스를 움직여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수십, 수백 개의 공고가 쏟아져 나왔다.
‘신입·경력 무관’, ‘사무보조’, ‘영업지원’… 단어들은 넘쳐났지만, 정작 서윤이 지원할 수 있는 디자인 자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었다.

그녀는 이력서 파일을 불러왔다. 몇 달 전 작성했던 것이라 표지가 낡은 종이처럼 퇴색해 보였다.

‘이직할 때 쓰려고 만들어놨던 건데.‘

서윤은 숨이 턱 막혔다.


‘경력: 업스텐션 회사 근무 (2024~2025)’

그 뒤에 따라붙는 단어가 문제였다.

권고사직.

그 두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명치가 뻐근했다. 면접관들은 아무렇지 않게 물을 것이다.
“왜 퇴사하셨죠?”
그 질문 하나로 서윤은 수십 번 머릿속에서 면접을 치렀다. 하지만 대답은 매번 똑같았다.
“…회사의 구조조정이 있었어요.”
거짓말이긴 했다. 실제로는 구조조정 따위 없었으니까.

커서를 경력란 위에 가져다 댔다. 삭제할까, 말까. 그냥 ‘자진 퇴사’라고 고쳐 적을까. 하지만 그러면 더 꼬일 게 뻔했다. 어차피 면접에서 물어볼 테니까. 숨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불리하고.

서윤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 나 진짜… 뭐 하고 있는 거야.”

잠깐의 침묵. 키보드 소리도, 창밖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시계 초침만이 또각또각 귓가를 때렸다.

그녀는 취업 사이트에 새로 올라온 공고들을 클릭해봤다.
어느 회사는 ‘2년 이상의 동종업계 경력 필수’, 다른 회사는 ‘해외영업 가능자 우대’라 적혀 있었다.
“이건 나랑 상관없지…”
조용히 중얼거리며 창을 닫았다.

다음 공고. ‘사무보조/계약직/6개월’.
이건 할 수 있을까 싶어 클릭했지만, 근무지가 집에서 두 시간 반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서윤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돈을 덜 벌고 말지…”

모니터 위 구석에는 지원 버튼이 파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은 도무지 그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마음이 가로막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된 걸까.

서윤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머릿속에 스쳐가는 건 노동청 감사관의 냉정한 목소리였다.
“증거 없으면 저희도 손 못 써요.”
그 말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증거. 증거.
내가 그때 녹음 버튼만 눌렀어도, 최소한 억울하다는 건 증명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회사 기록에는 ‘권고사직’으로 남아 있고, 제입으로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쓸모없는 사람이었나.’

속으로 삼킨 말이 그대로 목구멍에 걸려 나온 듯, 서윤은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가 너무 무거워서, 눈가가 금세 뜨거워졌다.

손등으로 눈을 훔치며 억지로 웃어보았다.
“쓸모없긴… 그래도 뭐, 살아 있잖아. 밥 먹고, 숨 쉬고, 이렇게라도 앉아 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은 자기 위안 같지도 않았다. 공허한 웃음이 방 안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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