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녀와 졸부 6화

실직

by 예나


하이팰리스 61층.

거실은 고요했지만, 대리석 바닥을 스치는 구두 소리는 묵직하게 울렸다.
박지운은 곧게 뻗은 어깨와 잘 다듬어진 검은 머리카락, 마치 광고 속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얼굴로 소파 앞에 섰다.

소파에 앉은 지운의 어머니 영미는 와인잔을 들고 앉아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지운을 위아래로 훑었다.
“앉아.”
짧은 한마디였지만, 지운은 군말 없이 마주 앉았다.

“이번 달엔 예주네 쪽 움직임이 많아졌다.”
영미의 손끝이 찻잔을 두드렸다.
“태주네 집안에서 예주네를 견제하는 건 알지? 네가 할 일은 간단해. 가까이 가서, 속을 들여다보는 거야. 그리고 내게 전부 말하기. 쉽지?.”

“네, 어머니.”

영미는 대답하는 아들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예주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 아파트에 살았던 동창이잖니. 친해져서 나쁠 건 없잖아? 이를테면 연인 사이로까지 간다 해도 너희 둘은 전혀 이상해보이지가 않아.

백예주랑 백태주 집안이 앙숙이긴 해도, 그 둘 다 휘어잡고 이용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해가 될 건 없다.”

“네…”

“아니면, 너에게도 의견이란 게 있는 거니? 얼마든지 말하거라.”

지운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백예주 말고… 이서윤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백예주랑 가까운 사이인데, 그쪽을 이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영미의 눈빛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 애, 어디 사는데? 잘 사는 애야?”

“아니요. 그냥 평범… 아니, 굳이 말하자면 좀 어렵게 사는 편입니다.”

영진은 미소도 없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안 돼. 무게 잡을 수 없는 사람은 우리 판에서 오래 못 버틴다. 쓸모도 없고. 하지 마. 그런 여자랑은 엮이지도 말거라.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백태주, 백예주, 그 둘 뿐이야.”

지운은 고개를 숙이며 “알겠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했지만,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불편했다.
그녀를 떠올리면… 왜인지 모르게 단순한 ‘정보원’ 이상으로 보고 싶어졌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현실로 그를 끌어당겼다.
“백예주만 잘 감시해. 그게 이번 달 네 임무야.”

“네.” 입으로는 순순히 복종했지만, 머릿속엔 서윤의 웃음과 말투, 그리고 가끔 보이는 단단한 눈빛이 떠올랐다.
명령에만 충실하던 그는 처음으로,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따르고 싶지 않았다.


사무실 불빛이 점차 희미해질 무렵, 서윤은 컴퓨터를 끄고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 종일 이어진 오 과장의 견제와 사소한 트집이 온몸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금요일에 함께 놀기로 한 예주와의 약속도 영식이 6시 직전에 준 잡무 때문에 취소고, 앞으로의 회사생활도 걱정 뿐이었다.

퇴근길에 혼자 집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머릿속에서 같은 말들이 맴돌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옆자리에서 예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임님, 오늘도 힘드셨죠?”
밝은 미소와 달리 예주의 눈에는 묘한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서윤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괜찮아. 뭐, 늘 있는 일이잖아.”
“괜찮다니요. 아까 과장 그 인간이 뭐라고 했는지 제가 다 들었는데.”
예주는 혀를 차며 가까이 다가왔다.
“근데 주임님, 생각보다 잘 버티시더라구요. 저라면 진작에 울었을 거예요.”

그 말에 서윤은 순간 마음이 저릿해졌다. 늘 혼자 싸우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자신을 보고 있었고, 또 같이 분노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큰 위로가 됐다.

퇴근 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회사 앞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임님, 요즘 오 과장 때문에 고생이 많아요.”

“뭘. 이제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직 일주일 밖에 안 됐는데 한 달 같네.”

“오늘 주임님이랑 같이 쇼핑 가려고 했는데! 눈치 없는 그 분 때문에 이게 뭐예요~!”

“그러고 보니 예주 씨, 남아있지 않아도 되는데 왜 남았어?”

“주임님께서 야근하시니까 저도 남았죠!”

서윤은 예주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솔직히 가슴이 찡했다. 다른 동기나 후임은 전부 서윤을 나 몰라라 하는데 예주만이 곁에 남아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다니, 솔직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요즘 내가 일에 집중 못하고 있고, 인정해. 난 지금 상태가 좀 아닌가 봐.”

“아니예요! 오영식 그 사람이 주임님 가스라이팅 하고 있는 거라고요. 오늘만 해도 말이 너무 심했어요. 자꾸 신입만도 못 하다느니…”

“됐어. 하하…”

“그놈 밑에서 군 소리 없이 일했던 서윤 주임님을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게 대한대요? 참아줬던 거에 감사할 것이지, 이건 아니죠!”

“고마워, 예주 씨.”

“…기분 조금 풀리셨어요?”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예주는 내게 왜 이렇게까지 잘해주는가.

과거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회사 사람 치고는 너무 가까워진 사이.

이대로 괜찮을지 서윤은 스스로 의문을 품었다.

“주임님, 저 사실… 회사에서 주임님 없었으면 진짜 심심했을 거예요.”
“아! 나야말로…”

“태주랑은 잘 되어가요?”

“태주 씨? 아.”

“네, 제 사촌이요. 후훗.”

“잘 돼가고 있지. 연락 어떻게 하는지 한 번 볼래?”

“어디 봐봐요… 우와~ 백태주 이 자식 이거 진심이잖아?”

“하하핫.”

“애가 되게 말이 없어 보이는데, 주임님한테는 역시 다르네요.”

“그래?”

서윤은 문득, 태주를 마주했을 때 표정이 안 좋아졌던 예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에 대해 혹시 태주와 사이가 안 좋은지 묻고 싶었지만 왜인지 쉽사리 물어볼 수 없었다.

예주는 어렵게 입을 떼며 물었다.

“있잖아, 혹시 태주 씨와 사이가 안 좋은 건…”

“그런 건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 비밀이에요!”

또 비밀이라고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고 선 긋는 예주의 태도에, 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서윤에게 예주는 가까워진 것 같다가도 알 수 없는 선이 존재했다. 안 그런 인간관계 없다지만 이상하게 예주에게서는 뭔가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예를 들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내에서 편을 들어주는 이 태도 말이었다. 서윤에게 예주의 말이나 행동이나 고마움 뿐이었지만 동시에 미안함까지 들게 해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 예주 씨…”

“그나저나 주임님, 저 알아요.”

“뭐를?”
“그냥, 알아요. 그거.”

“무슨…”

그때 서윤의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지운의 디엠 알람이었다. 서윤은 서둘러 숨겼다. 하지만 예주의 얼굴을 보고는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또 그 비릿한 미소다.

“저 알고 있었어요, 주임님. 박지운이랑 연락하는 거.”

“엇, 어어…. 언제부터 알았어?”

“저번에 휴게실에 있었을 때도 대놓고 보였는데! 모르셨어요?”

“아….”

서윤은 어찌 할 바 몰라 하고 있는데 예주가 말했다.

“걱정마요. 그런다고 제가 해코지라도 하나요?”

“…”

“저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에요~. 박지운이 뒤에서 저에 대해 뭐라 말하든, 그건 믿지 말라는 것. 이런 부탁 밖에는 드릴 게 없네요.”

예주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말이 끝나자 잠시 흐른 정적 속에서 묘한 무게감이 내려앉았다. 웃고 있는데, 눈빛만은 웃지 않는 듯한 느낌.

부탁이라기엔 너무 단정적인데… 서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알았어, 예주 씨. 화내지 마. 이건 단순히 호기심일 뿐이야.”

“누가 뭐라 했나요? 저 화 안 났어요! 그냥, 주임님께서…”

예주는 부끄러운 듯 말을 덧붙였다.

“저를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떤 상황에서든.”

그 말을 듣고 애틋한 감정이 느껴진 건 이상한 걸까, 정상인 걸까? 서윤은 이제는 예주는 물론이고 스스로도 알 수 없어졌다.









그런데 사내 단톡방에 반갑지 않은 알림이 울렸다.

서윤은 내용을 확인하고서 기함했다.

수당 없이 주말인 토요일에 나오라는 팀장의 지시였다. 그리고 그 날 나올 사람은 서윤과 오 과장이었다.

단톡방을 확인한 예주는 이거 문제 있는 거 아니냐며 또 대신 화내주었지만 이 순간에는 크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예주는 한 문자 한 문자 진심을 담아 팀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토요일에 일정이 있어서… 월요일날 야근하면 안 될까요?’

바로 팀장에게서 답장이 왔다.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예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둘만 남았을 때 뭐라고 혼낼지, 무슨 헛소리를 또 하진 않을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예주도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하필 둘이 나오라는 거예요? 팀장이랑 과장이 서로 짠 거 아니에요?”

“전부터 나랑 과장이 하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게 무산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윗선에서 생각이 바뀌었나 보다.”

서윤은 끔찍한 토요일이 상상됐다. 어떤 작업을 해도 돌아오는 건 잔인한 피드백 뿐일 것이다.

“아, 저라면 절대 안 나가요. 못 나가요.”

그 말에 서윤은 귀를 곧이세웠다. ‘안 간다’라…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보였다.

결국 토요일날 서윤은 출근하지 않았다. 서윤의 빈 자리를 보고 영식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윤은 태주와 함께 강남의 스시집에 있었다.

서윤이 말했다.

“점심은 제가 살게요.”

“됐어요. 서윤 씨는 가만히 있기만 해요. 제가 서윤 씨 사정 다 아는데요, 뭘.”

그 말에 서윤은 살짝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사준다는 태주의 말이 내심 고마웠다.

서윤은 지금까지 연애가 전부 더치페이거나 자기가 더 내는 편이었다.

서윤의 전 애인들은 몇 백원 단위까지 따져가며 서로 데이트비용을 칼같이 반으로 나눠왔는데, 태주는 달랐다.

‘역시 금수저면 이런 건가.’ 서윤은 씨익 입꼬리가 찢어지려는 걸 참았다.



월요일이 왔다. 서윤이 출근했을 때 회사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갑기만 했다. 그런데 동기 민정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서윤을 불렀다.

“서윤 주임님, 회의실로 오라셔요…”


서윤은 회의실로 불려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고, 묵직하게 울렸다.
회의실 안에는 인사팀 과장과 본부 소속 부장이 앉아 있었다.

“이서윤 씨, 자리에 앉아요.”
인사팀 과장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무표정했다.

서윤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손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최근 업무 관련해 서윤 씨네 팀장님과 논의가 있었어요. 몇 가지 피드백이 반복적으로 들어왔고요.”

“...어떤 피드백이요?”
서윤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부장이 말을 이었다.
“업무 집중도, 기본적인 실수, 팀워크 등 여러 면에서 조직과의 적응이 어렵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에 박혔다.
서윤은 숨을 들이켰다.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요.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어서—”

“그건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도 충분히 유연하게 접근하려 했어요. 그런데, 토요일에도 안 나왔다면서요?”
인사팀 과장이 말을 끊었다.
“팀 내 역량 균형과 조직 분위기를 감안했을 때, 이서윤 씨가 잠시 쉬는 게 서로에게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권고사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서윤의 목소리는 떨렸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분했다.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식은 ‘본인 희망에 의한 퇴사’로 정리할 수 있어요. 필요한 절차는 저희가 도와드릴 거고, 회사는 이서윤 씨가 여기까지 함께 해준 데 감사하고 있습니다.”

서윤은 잠시 말을 잃었다.
창밖엔 햇빛이 쨍했지만, 그 빛은 어디에도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더는 아무것도 안 할게요.”

말을 끝낸 순간, 왈칵 올라오는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눌렀다.
이 회의실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더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서류에 서명하고, 책상을 정리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고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비로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게 끝나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32분이었다.


1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을 보낸 이 직장에서 나오는 게 30분 남짓만에 끝나다니.

서윤은 허탈해하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척 하면서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몇몇은 정말로 수군거렸다.

“…진짜로 잘린 거야?”

“요즘 문제 있어 보이긴 했어.”

“또 그만두는 사람 나왔네. 이번이 몇 번째야?”

서윤은 입술을 꾸욱 눌러 물었다. 그녀는 동기 민정에게 고마웠다고 간단히 인사한 후 밖으로 나왔다. 예주가 따라 나왔다.

“주임님!”

“…주임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이제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돼요.”

“그치만!…”

“고마웠어요.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제 잘못도 있겠죠, 뭐.”

서윤은 예주를 향한 미소를 억지로 지은 채, 조용히 몸을 돌려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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