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주와의 첫 데이트
영식은 순간 얼굴 근육이 굳는 것을 느꼈다. 커피의 쓴맛이 갑자기 목에 걸린 듯했다.
“그게… 어떻게 알았지?”
그는 생각보다 작고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원은 민망한 듯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사내 커뮤에 떴어요. 캡처도 막 돌고 있고요… 다들 봤어요.”
영식의 손이 무릎 위에서 서서히 주먹을 쥐었다.
“…캡처?”
그 순간, 사무실 뒤편에서 몇 명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8살 차이 나지 않아?”
“이게 그건가, 영포티 그거..”
누군가는 대놓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눈을 피하며 키보드만 두드렸다.
“아니야. 난 그냥… 그냥 밥이나 먹자고 한 거야. 드라이브는… 그건 오해지.”
영식은 뭔가 해명하려 했지만 말이 꼬였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떨궜다.
그때, 팀장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영식 과장, 잠깐 회의실로 와줘요.”
그 말에 사무실 공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영식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머릿속이 어지러웠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적막이 흘렀다.
“지금 상황, 알고 있죠?” 팀장은 짧게 말했다.
영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 씨가 인사팀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했어요. 내용은… 사적인 접근, 반복적인 연락, 그리고 불쾌감을 느꼈다는 진술입니다.”
영식은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이건 단순한 오해가 아닐 수도 있어요. 오영식 과장, 이 문제… 심각하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사무실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모두가 무언가를 알고 있었고, 아무도 예전처럼 그를 보지 않았다.
영식은 입술을 깨물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나 지금 서윤은 명료하게 미소 지으며 업무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점심시간 휴게실. 서윤과 예주 둘 뿐이었다.
서윤이 아이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아~ 속시원해!”
“주임님, 정말 큰 결단 내리셨어요! 잘하셨어요~!”
“크~.. 나 잘한 거 맞지, 예주 씨?”
“그럼요! 오영식 과장 같은 사람은 이렇게 미리! 싹을 잘라놔야 해요~.”
“아~ 나 그 자식 마음에 안 들었는데 나 너무 기분 좋아 지금. 어떡해!”
“그럼 이번 주 금요일에 저랑 쇼핑 가실래요?”
“어? 쇼핑?”
“이렇게 신날 때는 쇼핑이죠!”
서윤은 잠시 생각하는 듯 멈칫했다. 이런 금수저랑 내가 쇼핑을 했다가 나만 무리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곧이어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그래! 좋아! 어차피 애인도 없는데 뭐, 예주 씨랑 주말 보내면 나야 좋지? 하하하.”
“태주랑은 연락 잘 돼가요?”
“으음, 그게… 아직 연락이 없네.”
지운 씨도 연락이 없고. 서윤은 주말동안 복에 겨운 망상에 빠졌었다. 지운과 태주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자 이서윤으로… 정말 창피하기 그지없다. 지운은 계속 연락 오고는 있지만 대화가 자주 있지는 않다. 하루에 서너 번 정도. 아침은 먹었냐, 예주랑 잘 지내냐, 오늘은 뭐했냐, 이런 짧게 안부 묻는 이야기. 만나자는 말은 몇 번 거절하니 더 이상 지운 쪽에서도 꺼내는 얘기가 없었다.
그리고 주말동안 태주는 아예 연락이 없었다.
“주임님, 그러지 말고 먼저 연락해봐요~ 태주 그 녀석 부끄럼 많으니까요.”
“그, 그럴까? 그래,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여자가 먼저 디엠 한다고 뭐 안 좋아지진 않겠지?”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탁자 위 화면이 켜지고, ‘지운’ 이름이 떴다.
“아…” 서윤은 무심한 척 화면을 눌렀다.
‘평소에 뭐 좋아하세요?’
‘저 음악 듣는 거 좋아해요 힙합이라던가 발라드’
답장을 마친 서윤에게 예주가 물었다.
“누구예요?”
“어? 아! 아는 사람…”
서윤이 지운과 대화한다는 건 비밀이었다. 서윤이 대놓고 피하라고 한 인물과 접촉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거슬리는 게 있다면, 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그때였다.
“설마…”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주임님, 그쵸?”
이번엔 태주였다.
‘오늘 뭐해요?’
서윤은 커피를 내려놓고는 떨리는 손으로 답장했다.
‘오늘 아무것도 안 해요’
‘그럼 오늘 보실래요?’
서윤은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하고는 답장했다. 흰 티셔츠에 검은 슬랙스, 전형적인 모나미룩. 이런 심심한 차림으로는 태주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일은 어때요?’
서윤은 자신의 웃음을 예주에게서 감출 수 없었다. 예주는 그 모습을 비릿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 화요일이 되었다.
서윤은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동료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사건이 사그라드는 듯했지만, 진짜 불편함은 그 뒤부터 시작이었다.
오영식 과장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그녀를 대하기 시작했다.
“이서윤 씨, 이 작업물… 이게 결과물이야? 아마추어가 해도 이거보단 잘 한다.”
그는 팀원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서윤은 깜짝 놀라며 문서를 다시 들여다봤다. 어제 밤 11시까지 붙잡고 고쳤던 문서였다. 문제를 지적받은 항목은, 오히려 과거 그가 직접 승인했던 양식 그대로였다.
“죄송합니다. 다시 검토하겠습니다.”
서윤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검토? 자꾸 이래서야 회사에 왜 있는 거지? 집중력 부족한 거 티나. 요즘 일에 신경을 못 쓰는 거 같던데… 사적인 일 때문에 흔들리는 거 아니죠?”
순간 사무실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몇몇 동료들이 모니터만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나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날 오후, 오 과장은 팀원 전체가 보는 단체 메신저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서윤 씨, 오전에 지시한 자료 아직인가요? 다들 자기 일에 집중하는데, 혼자 너무 처지는 듯. 다음 주 인사 평가도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그 메시지는 평범한 업무 지시처럼 보였지만, 누구나 그것이 공개적인 경고라는 걸 알았다.
서윤은 손에 힘이 빠진 채, 키보드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입술을 깨물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점심시간, 평소 함께 밥을 먹던 동기 민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윤아… 너, 혹시 괜찮아? 너무 티나게…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서윤은 애써 웃어보였다.
“괜찮아. 일만 잘하면 돼.”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문제라는 걸.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라는 것도.
서윤이 한숨을 내쉬는 순간,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서 알람이 떴다.
‘주임님, 또 그 인간이에요? �’
서윤은 짧게 답했다.
‘응… 뭐, 괜찮아.’
잠시 후 예주의 답장이 연달아 왔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과장 그 인간, 진짜 왜 그런대요? 지가 잘못해놓고.
버티세요. 금요일까지 3일 남았어요. 우리 그날 스트레스 다 날려버려요!’
서윤은 모니터에 비친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고마워.’
‘저는 주임님 편이니까요!’
영식이 쏘아붙이는 말투로 말했다.
“서윤 씨, 지금 뭐하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과장님.”
“일에 집중해. 근무 태만이야, 그거.”
“네…”
모니터를 보며 킥킥댔던 서윤의 표정은 한껏 일그러졌다.
저녁이 되어 퇴근 시간이 왔다.
서윤이 예주, 동기 민정과 함께 퇴근하는데 주차된 차를 보고 깜짝 놀랐다.
회사 앞에 오픈 스포츠카가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운전석에 있는 건 다름아닌 태주였다.
그를 보고 예주의 얼굴은 차갑게 변했다.
서윤이 물었다.
“예주 씨, 괜찮아?”
민정도 걱정했다. “어? 그러게. 예주 씨. 어디 아파?”
“…아니요. 괜찮습니다.”
예주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주는 그런 예주를 보고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예주의 눈은 일순간 뒤틀렸지만 금방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변하여 말했다.
“저 진짜 괜찮아요. 하하. 저 이제 들어가볼게요. 민정 주임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서윤 주임님, 화이팅!”
홀연히 가버린 예주를 뒤로 하고 민정은 오픈카에 감탄하고 있었다.
“우와… 아, 안녕. 내일 봐, 서윤 씨!”
민정도 후다닥 가버리고 서윤만 남았다.
서윤이 차에 타려는데 누군가 시선이 느껴져 회사 쪽을 보니 오영식 과장이었다.
서윤은 치에 떨며 태주 옆자리에 앉았다.
태주가 물었다.
“누구예요?”
“있다가 말할게요. 사이는 별로예요.”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재밌겠는걸요. 그럼 출발할게요.”
부웅- 태주의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차는 한남동 고급 레스토랑에 주차됐다. 서윤은 얼떨떨한 자세로 차에서 나왔으나 주변 모두의 시선에 그녀의 발걸음은 점차 당당해져갔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검은 색 원피스. 서윤은 이 옷이 태주의 푸른 색 셔츠와 정장 바지 차림에 퍽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한껏 차려입은 남자 직원이 서 있었다. 서윤은 직원의 외모에도 놀랐다. 이런 데는 직원도 아무나 뽑지 않겠구나, 싶었다. 태주가 말했다.
“두 명, 이름은 백태주요.”
“네,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기다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멀끔한 직원들이 나와 태주와 서윤을 예약석으로 안내했다.
직원이 의자까지 빼주자 서윤은 순간 당황했지만, 태주의 시선을 의식해 우아하게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촛불이 은은히 타오르고 있었고, 물이 든 유리잔에는 이미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와…”
서윤은 눈을 돌리며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태주 씨, 이런 데 자주 오시는 거예요?”
태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요. 사실… 오늘 처음 와봅니다.”
“에이, 설마.”
서윤은 웃음을 터뜨리며 와인 메뉴판을 내려다봤다. 가격은 숫자보단 미술작품 같았다. 눈치껏 닫으려는데 태주가 슬쩍 말했다.
“부담 갖지 마세요. 제가 고를게요.”
그 말에 서윤은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졌다.
잠시 후, 스테이크와 파스타가 차례대로 나왔다. 접시마다 예술처럼 장식된 소스와 꽃잎이 얹혀 있었다.
서윤은 포크를 들고도 선뜻 음식을 입에 넣지 못했다.
“맛없으면 솔직히 말해도 돼요.”
태주가 먼저 칼을 썰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도 처음엔 이런 데서 뭐 먹으라는 건지 몰라서요. 그냥 고기랑 면이잖아요.”
서윤이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
둘은 눈이 마주치자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서윤의 마음속 긴장이 풀려나갔다.
“근데…”
잠시 식기가 멈추자 태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주말에 연락 못 드려서 미안해요. 계속 서윤씨 생각은 했는데… 괜히 이상할까 봐.”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히려 제가 먼저 연락했어야 하는데.”
테이블 위 촛불이 흔들리듯, 두 사람의 대화도 점점 부드러워졌다.
와인잔이 살짝 부딪히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태주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은 누구예요?”
“네? 아...”
서윤은 오영식 과장을 떠올렸다. 입맛이 조금 떨어졌지만 말을 이었다.
“저랑 8살인가 나이 차이 나는데 같이 드라이브 가자고 했던 사람이예요.”
“그런…”
“제가 그걸 인사과에 알리고 캡처해서 블라인드에 올리고 나서부터 자꾸 절 괴롭히는데,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할지.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괴롭히는 데는 얼른 그만둬 버려요.”
“네?”
너무나 쉽게 그만두라고 말하는 태주에게 서윤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태주가 말했다.
“아니, 그렇잖아요. 그런 사람이 여지껏 떵떵거리며 다닐 수 있는 회사라는 것 자체가, 거기가 문제 있는 데 아니예요? 동조하는 사람까지 있다니.”
“그렇군요.”
“저 같으면 진작에 관뒀어요. 그런 사람이랑 어떻게 일해요.”
서윤은 태주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서윤에게 그 회사는 단순한 돈줄이 아닌, 생존을 위한 밥줄 그 자체였다. 서윤은 퇴사를 쉽게 말하는 태주에게서 영락없는 금수저라는 느낌을 받았다.
“저도 제가 그렇게 쉽게 그만둘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거예요.”
그 말에 태주의 눈이 동그래진 걸 느꼈지만 서윤은 신경쓰지 않고 와인잔을 들었다.
“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