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녀와 졸부 4화

하이팰리스 입주민 파티

by 예나

솔직히 말하자면 서윤은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 밖에 없다.

나보다 우월한 줄 알았던 백예주 네가 사실 나 못지 않게 ‘잘나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

그 생각이 서윤의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기쁜 시간을 보내던 중에 이 남자 박지운이 당황스럽게 한 것이다.

꺼림칙한 인스타그램 디엠이라니.

서윤의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자랑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여행 게시물도 명품이나 중저가 디자이너 브랜드 구매 인증샷도 없었다.

그나저나 예주가 인스타그램을 하는지 안하는지조차 서윤은 모른다.

그런데 지운은 어떻게 내 계정을 알아내고 연락한 걸까?


서윤은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타자를 써내려갔다.

‘제 인스타그램은 어떻게 아셨죠?’

‘알고리즘으로 뜨더군요’


예주가 물었다.

“주임님, 썸남 있어요?”

서윤은 화들짝 놀랐다.

“썸남이라니?! 그, 그런 거 아냐!”

“그럼 누구예요? 왜 이렇게 표정이 설레는 표정이예요~”

예주의 눈이 서윤을 꿰꿇는 것만 같았다. 서윤은 입을 합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거 아니야.”

“후후, 계속 하세요. 저는 또 통화할 일이 있어서..”

예주가 자리에 일어나자 서윤의 눈은 다시 화면으로 고정됐다.


‘그래요?’

그 외에 서윤은 할 말이 없었다. 머리에 여러 갈래 생각들이 떠올랐는데 말이다.

지운이 다시 바로 답장해왔다. 그 알람에 서윤은 저도 모르게 귀가 빨개졌다.

‘지금 예주랑 같이 있어요?’

‘네 왜요?’

‘예주가 뭐라던가요?’

서윤은 ‘그걸 제가 왜…’라고 치다가 다시 지우고 수정했다.

‘별 거 없어요 회사 얘기죠 뭐’

‘입주민 파티에 부르던가요?’

서윤은 할 말을 잃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그 자리에 예주라도 있어서 이 모든 대화를 불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답장 보냈다는 것 자체를 예주가 싫어할 것이 우려되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서윤은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가방 안에 쑤셔 넣어 버렸다.

얼마 안 되어 예주가 돌아왔다.

“예주 씨. 예주 씨야말로 누구랑 그렇게 통화해? 남자 아니야..?”

서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임님은 모르셔도 돼요.”

예주는 여유롭게 덧붙였다.

“아직은.”

그 말에 서윤은 예주에게 말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지긋지긋한 평일이 찾아왔다. 서윤은 예주와 함께 드레스를 골랐던 게 꿈 같았다. 그렇지만 다가오는 토요일날 입주민 파티가 기대되어 세상 긍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너무 들떠있어서 서윤은 업무상 실수를 저질렀다. 디자인 업무가 대부분인데 파일을 잘못 보낸 것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안할 실수였다. 과장인 영식이 먹잇감을 찾은 매 마냥 서윤을 붙잡아 일렀다.

“서윤 씨, 이렇게 일하면 안 되는 거야. 알아? 여길 다닌지 1년 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이런 식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도 듣기 싫고 그냥 하… 들어가봐.”

이 병신은 생리도 안 하는 게 왜 지랄이야, 서윤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그때였다. 영식이 돌아서고, 서윤이 자리에 돌아왔을 때, 예주가 영식이 혼내던 표정을 우스꽝스럽게 따라했다.

서윤은 웃음을 꾹 참으며 그만하라고 속삭였다.

예주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영식이 쟤 서윤 주임님한테 플러팅하다 까인 거 아니에요?’

‘뭐? 예주 씨! 과장이 나한테 그러는 거 다 티나?’

‘티 엄청 나요.. 둘이 맥주집 간 것도 쟤가 엄청 떠벌리고 다녔는데, 한 번 가신 것 아니었어요? 쟤는 무슨 매일 갔다는 식으로 구라치던데.’

서윤은 혼났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갑갑해졌다.

예주가 메신저를 이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토요일이 얼마 안 남았어요~’

서윤은 버릇대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래, 얼마 안 남았다.

예주와 함께 급이 다른 그 공간에 설 날이. 마음 같아선 시상식 전 여배우라도 된 기분이었다.

서윤은 저도 모르게 황금빛 긴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을 걸으며 유명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상상을 했다.

머리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도 상상의 시간을 잠시 가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때 예주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근데 주임님 이대로 가만히 계실 거예요?’

‘뭐가? 오영식 저 자식? 뭐 어쩌겠어’

‘알았어요 제가 참견할 일 아니죠 뭐’

거기에 서윤은 생각이 깊어졌다.

내가 오영식 이 자식 담가버려?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얘주에게서 연신 메신저가 왔다.

‘안 그래도 과장 저 사람 소문 안 좋아지고 있어요’

‘결정타 한 두 개면 쟨 이제 끝이죠 ㅋㅋㅋ’


그때 지운에게서 디엠 알림이 왔다.

‘오늘 뭐해요?’

서윤은 무시했다. 지금은 미남에게서 온 디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영식에게 당한 분노와 자존심이었다.


어느덧 서윤이 고대하던 토요일이 왔다.

그는 예주가 골라준 옷 그대로 입은 채 장소에 도착했다.

파티장은 7층 그랜드홀, 황금빛 샹들리에 아래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빛나고 있었다.

조명은 부드럽게 퍼지고 있었다.


서윤은 무대 위의 배우처럼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내딛었다.
드레스는 무게감 있는 새틴으로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밑단은 마치 물처럼 바닥을 쓸었다.
그녀가 걷는 자리에 향기가 남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이 공간에서는 누구나 잘나 보였고, 누구나 가면을 쓴 듯 웃고 있었다.

예주는 이미 다른 무리 속에 섞여 웃고 있었다.
완벽한 메이크업, 환한 웃음, 영락없이 잘난 모습에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윽고 예주가 아는 척 해왔다.

“오셨어요, 주임님.”

그가 주변인들에게 서윤을 소개했다.

“여기 이쪽은 우리 회사 선배예요. 동네 근처에 살아서 친해졌죠.”

동네 근처에서 살고 있다니? 내가? 서윤은 예주에게 뭐라 묻고 싶었지만 알 수 없는 위압감 있는 분위기에 그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박지운은 파티장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검은 수트를 입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친 순간, 그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서윤은 다가가지 않았다.

왠지 그 거리감이 유지되는 편이 서로에게 안전하다고 느껴졌다.


그때 서윤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우울한 음기가 가득해보이는 사내였다. 축 늘어진 금발에 창백한 피부, 존재감 있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마치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조각상 같았다.

“안녕하세요. 백태주라고 해요.”

지운은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간 채 차가운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겼다. 예주에게로.


서윤이 말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서윤입니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아, 저 백예주 씨가 초대해서 왔어요. 같은 회사 선임이예요.”

“그렇군요.”

짧고 단정한 대답이었다.
그 뒤로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서윤은 손에 쥔 와인잔이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태주가 먼저 말을 이었다.

“전 예주 사촌동생이예요.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서윤은 잠시 당황했다.

이 질문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던져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크지는 않았다.

“저요? 스물 아홉이요. 태주 씨는요?”

“전 스물 다섯이예요.”

“여기... 자주 오세요?” 서윤이 되물었다.

태주는 시선을 천천히 돌려 주변을 훑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이 공간이 아무 의미 없다는 듯 공허했다.

“아뇨. 여긴 처음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네요.
예전에도 이런 자리에 끌려다닌 적이 많아서 그런가 봐요.”

서윤은 그가 '끌려다닌'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했다.
자발적으로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란 뜻.
그럼 오늘도 마찬가지일까?

“그럼 오늘도... 끌려오신 거예요?”
서윤은 무심한 듯 물었지만, 눈은 태주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잔을 천천히 돌렸다.

“네, 예주 씨가 꽤 위험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걱정돼서 왔죠.”

“네?”

“농담해봤는데.. 재미없었나요, 하하.”

그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예주 누나요. 우리 집이 좀, 복잡해서요.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누가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아, 말실수.”

그리고 태주는 마침내 서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근데 그쪽은… 그냥 회사 선임 맞아요?”

그 시선에 서윤의 와인잔을 든 손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무슨 뜻이에요?”

“아뇨. 그냥.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 예주 누나를 목적 없이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누구든, 뭔가 원하니까요.”

그리고 그는 웃었다.

그 웃음은 차가웠다.

어디선가 음악이 바뀌었고, 파티장 중심으로 무용수들이 춤을 시작했다.

서윤은 그 소용돌이 속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예주는 멀리서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지운이 옆눈으로 태주를 힐끗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예주. 나도 거기 끼면 안 될까?”

“무슨 소리일까?”

“네가 꾸미는 이 판.
내가 예전엔 엉망이었지만… 지금은 좀 달라졌거든.”

“하, 역시.
너도 너네 엄마한테 얼마나 깨졌는지 티 난다.”

지운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잔을 입에 대었다가, 다시 내려놨다.

“그러는 너는? 아닌가?”

예주는 지운의 얼굴을 쏘아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집은 그런 거 없어.”

“너네 집안 딱 봐도 복잡해보이던데. 한 명이라도 편이 필요하지 않겠어?”

예주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곧 아주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말했다.

“말했잖아. 너 같은 애들 도움은… 처음부터 고려한 적 없어.”


서윤이 춤 추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고 있는데 태주가 말했다.
“저… 실례가 아니라면,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침잠한 태주의 눈동자에 스치듯 빛이 흘렀다.
“아… 네. 좋아요.”

서윤은 홀린듯이 태주의 휴대폰에 손을 갖다댔다. 태주는 예주가 가까이 오는 걸 보더니 보란듯이 서윤에게 속삭였다.

“연락할게요!”

태주는 사람들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예주는 그런 태주를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더니 서윤에게 말했다.

“백태주네요. 제 사촌.”

“아, 예주 씨. 사촌동생하고 어때?”

“비밀이예요.”

“하하, 비밀이 많은 여자네, 예주 씨는.”

예주는 윙크를 했다.

“태주 어때요?”
예주가 슬쩍 미소 지으며 물었다.

서윤은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 백태주 씨…”

“솔직히 말해요.
애 좀 음침하긴 한데, 꽤 괜찮게 생기지 않았어요?”

“엇? 아, 아하하하.”
서윤은 당황한 듯 웃었다.
예주가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낼 줄 몰랐다.

“음… 솔직히 그런 느낌은 있어.
조금, 뭐랄까…
말수 적고 분위기 묘한데, 사람 자체는 괜찮아 보이더라고.
되게… 낯가림도 있고 조심스러운 타입?”

예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잔을 휘저었다.

“그쵸?
근데 그거 알아요?
태주 저 녀석, 은근히 자기가 분위기남이라고 착각하거든요.”

서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요? 그런 말도 안 할 것 같은데…”

“겉으론 안 하죠.
근데 딱 보면 알아요.
여자들이 자길 좀 신비롭게 본다는 거 알더라고요.
그걸 또 은근히 즐긴다니까.”

“하하… 아, 좀 알 것 같기도 해요.”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난 그게 나쁘진 않았어.
다른 사람들처럼 지나치게 나서는 것도 없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고… 좀, 편했어. 이상하게.”

예주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편했다?
서윤 주임님이 누굴 편하다고 느끼는 건 꽤 드문 일 아닌가요?”

서윤은 순간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에이, 아니야. 그냥…
이상하게 대화가 어렵지 않았다고.
좀 긴장됐지만, 막 싫거나 불편하진 않았어.”

“흐음… 그럼 설마…”
예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묻는다.
“혹시 연락처라도 주고받은 거예요?”

서윤은 와인잔을 들다 말고 멈칫했다.
“어… 어쩌다 보니까?”

예주의 눈이 커졌다.

“진짜요?
태주가 번호 달라고 했어요?
와, 얘 왜 이렇게 의욕적이야.
저런 스타일 아니거든요, 원래.”

서윤은 괜히 쿨한 척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뭐, 친근하게 보이려는 거 아닐까?
의외로 말도 좀 붙이고, 사람 생각보다 덜 딱딱하던데?”

예주는 조용히 서윤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완전 하수라니까요. 저 녀석.”
“아, 그래?”

“네.
눈치 없고, 타이밍도 늘 한 템포 늦고.”

서윤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 뭔지 알 것 같긴 해.”

“그럼 둘이 잘해봐요.
우리 집안 문제만 없으면 내가 적극 밀어줄 텐데.”

“문제?”

예주는 잔을 입술에 댔다가, 서윤 쪽을 한 번 스윽 바라봤다.
눈이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씁쓸한 기색이 스쳤다.




꿈 같던 토요일이 끝나고 일요일이 찾아왔다.

서윤은 매주 이 날마다 방청소를 하고 예능을 보며 월요일이 다가오는 것을 애써 회피했다.

쓰레기 봉투를 묶고 내놓고 청소기를 돌리면서 서윤은 어제를 회상했다.

술 맛도 소주, 맥주 같은 거랑 차원이 달랐고, 무엇보다 예주가 소개시켜줬던 사람들과 대화의 품격이 달랐다.

맨날 회사 가십이나 얘기하는 팀원들과의 카페 타임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서윤은 지금 이 순간이 허무하고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때 카톡 알림이 울렸다.

서윤은 혹시나 하고 휴대폰 쪽으로 달려갔다.

안타깝게도 영식이었다.

‘서윤 씨 시간 많으면 나랑 드라이브 어때?’

서윤의 손은 부들거리고 미간은 한껏 찌푸려졌다.

서윤의 입꼬리는 올라갔다. 예주의 그 메신저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과장 저 사람 소문 안 좋아지고 있어요’

‘결정타 한 두 개면 쟨 이제 끝이죠 ㅋㅋㅋ’



다음 날 영식은 흥얼거리며 회사에 출근했다.

자판기 커피를 내리고 홀짝이며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사람들의 달라진 시선이 느껴졌다.

영식은 떨떠름한 얼굴로 자리에 가 앉았다.

옆에 있던 사원이 영식에게 말했다.

“과장님.”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물었다.

“서윤 씨에게 드라이브 가자고 했다는 거 진짜예요?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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