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당신만의 블랙홀은 무엇인가요?

- 내 안의 별들을 모두 빨아들여버린 그림블랙홀 -

by 린ㅡ

말이 내어지지 않고 소심한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사소한 질문에도 생각이 나아가기보다 슬금 미소 지으며 아래 세 개와 유사한 정답지 중에 얼른 말이 나와버린다.


"다 좋아!", "아무거나", "난 상관없어."

누군가와 다른 의견일까 봐 두려워서 해버렸던 그러한 대답들에 스스로 익숙해진 탓도 있을 테고,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탓에 정말 먹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나의 의견'이라는 것이 없이 살았던 듯싶다.



누가 그랬다. 인간은 평생 한 번은 사고를 친다고.

어릴 때 얌전하고 사춘기도 겪지 않은 착한 아이, 사고 칠 아이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언젠가 꾹 참았다가 더 큰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고.


내가 딱 그랬다.

한 번도 큰 소리로 나의 의견을 내어본 적 없던 내가 감히 그랬다.




형편이 어려우니 공부만이 살 길이라고 하여 혼자 교과서만 읽어가며 심히 공부 보았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 홀로 서울에서 대학교도 다녀 보았고, 졸업 직전 부모님이 좋아하시던 직업에 합격하게 되어 그렇게 15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열심히 일도 해보았다.

어리석게도, 무지하게 열심히 살았다.


한 순간도 내 인생 안에 공백이라는 것이 없었다.


국세청. 국세공무원. 세무서.

사실 난 나와 함께했던 그 오랜 직업이 가장 내기 어려운 단어이다. 말하는 순간부터 숨이 가빠지는 것 같은. 그러니 이렇게 소심하게 한 번씩 조그마하게 글자로라도 연습해보려 한다.

여하튼.


호흡곤란을 오랫동안 안고 살다 위험한 상황까지 겪고 나니, 간절하게 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벗어난다'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곳으로 숨어 편안하게 '숨'이라는 것을 쉬어보고 싶었다.


사직.

그것은 그렇게 그 단 한 가지의 이유, 숨을 쉬고 싶어서, 살기 위해서 선택한 일이었다.

처음으로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나만의 결정.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통보'와 같은 것이었고, 내 인생에서 내 마음대로 친 '큰 사고'이니 모두 놀랄 수밖에.


그때 내게 한 약속이 있었다. 사실 난 어떤 약속도 답답할 정도로 꼭 지키는 사람이다.


이왕 사고 친 거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자!



그 첫 번째가 바로 이 사태를 만든 주인공, '그림'이다.


나의 전공은 경제학, 그리고 직업은 국세공무원. 지난 세월 그림과는 완전히 딴 별에서 살았다. 전시회조차 한 번 가본 적이 없고, 그 별에 사는 친구 사귀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 중 행복했던 기억은 단연코 그림을 그리던 순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기에 그랬을 테지만 여하튼 그렇기에 내가 하고 싶었던 일 중 첫 번째는 바로 '그림'이었다.


무엇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부터가 막막해서 광고로는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성인취미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홍대 근처, 일주일에 한 번, 2시간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한 달에 9만 원으로 요즘 이렇게 취미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이 많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는, 심지어 말이 잘 내어지지 않는 소심함까지 겸비한 나에게는 어려운 공간이었다.


재료들이 펼쳐져 있고 그중 본인이 원하는 재료를 찾아와서 그리는 것인데,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어떤 그림부터 시작하는 게 좋은지, 어떤 재료들이 처음 시작하기에 쉬운 편인지.. 수많은 수강생들이 2명의 선생님을 이리저리 부르는 바람에 정작 나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나는 무엇을 배우기에도 늦은 나이구나.', '역시 재능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구나.'라며 혼자 실망도 하고 슬프기도 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그림이라는 것이 참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화실에서 관심 있는 재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온라인으로 똑같이 주문해서 샀다.

그러고는 집에서 혼자 그리기 시작했다.




간절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든 하게 되는 법. 처음 마음을 가지는 것이 극도로 어려울 뿐, 그 이후에는 어떻게든 나아가진다.

이렇게 소심한 겁쟁이인 나조차도 그랬다.


난 내가 빠져버린 줄도 몰랐다. 빠져버렸다는 인식조차 할 겨를이 없 정도로 심각하게 빠진 게다.


수술을 하고 퇴원한 날 가족들 몰래 앉아 그림을 그렸고, 아이들을 재우고 그리다 새벽 3,4시에 잠들어 2,3시간 자고 일어나는 일상, 주말에는 하루 꼬박 밤을 새우는 날도 여럿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에 주말에 밤새워 그릴 수 있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주중 나날들을 보냈다.


모든 주 단위의 일정은 반드시 필요한 일정 외에는 잡지 않았다. 그만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므로.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 아이들이 학교급식을 먹고 오는 점심 때는 늘 라면. 일주일에 라면을 딱 한 다발씩 먹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가버렸다.


지난 세월 동안 참고 있었던 마음을 해갈할 요량으로 시작한 것인데, 불가능함을 느꼈다. 그릴수록 더 고팠다. 아주 이 나게 심각한 상태임은 분명했다.



재능과 배움이 없이 낡은 손으로 그리는 그림은 당연히 엉망진창이었고, 그리는 책상과 그 주변도, 그만큼 놓아둔 집안일에 집조차 엉망진창임에도 그 조그마한 그림책상을 하루 종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는 마법 같은 공간이자,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는 나만의 블랙홀.


그리는 동안은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감히 어떤 불안이나 걱정 따위가 들어올 틈이 없었다. 지금 현재의 나만 내 안에 오롯이 있게 하는 명상과도 같은 일이었고,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나에게는 정신과 약이나 호흡 훈련법과 같은 일보다 이것이 훨씬 더 효과가 있었다.


내가 죽음에 임박하게 되는 순간, 어느 누구도, 어느 무엇도 내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극한의 고통의 시간 속에 있을 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덜 아프고 덜 두려울 것 같다.


그림은 내게 딱 그랬다.

을 수가 없고 빠져나올 수도 는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내 마음에 고이 덮어두었던 그림이라는 블랙홀에 깊숙이 빠지게 되었고, 지금은 내 안의 많은 것들을 빨아들이며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더 큰 공간을 내 안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맞아, 힘들었어! 즐거움만큼:D



누가 내게 물었다.

"그거 그려서 뭐 하게?"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냥 모든 것이 좋았다.

내겐 그림이 그랬다.



이해불가능한 자신만의 블랙홀.

그것이 누군가에겐 집안일일 수도 있고, 걷기, 음악, 사진 등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스스로를 치유하게 할 수도 있고, 삶을 살아가게 하며 더욱 풍요롭게도 만들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그림이라는 블랙홀에 풍덩 다이빙고 행복함에 허우적거릴 테다.


그리고 그 끝엔 무엇이 있는지 이제 보여줄 테다.

나도 몹시 궁금하니까.

자, 그럼 오늘도 '그림블랙홀'로 풍덩 빠져볼까.


어푸어푸!





린-의 그림블랙홀
이전 04화202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