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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Jul 07. 2023

'당신'에게 필요한 '나의 기억조각'연고

- 같은 시공간, 서로 다른 기억들 -


부모라면 다 알 줄 알았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하지만 이제는 부모도 그저 많은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중 나의 아이에게 가장 관심이 많은 사람, 부모라는 자리는 처음이기에 아는 것은 없지만 아이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배워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달리 실수투성이인 나는 아이와 함께하는 매 순간 한 발짝 멀찍이 서서 깊이 생각해 보려 노력하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다.




엄마가 대학병원 치료를 위해 올라오셨다. 불면증을 오랫동안 앓으신 터라 밤새워 이야기하는 때가 많았다. 작년부터 원인불명의 질환으로 많은 과를 돌며 진료와 치료를 반복하며 함께 지내야 했고, 그럴 때마다 엄마의 불면증이 가장 먼저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한밤중에 캄캄한 방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뒷모습을 보면 수년동안 고요히 우울함을 곱씹었을 그녀의 마음속이 껴져, 그것이 마치 나의 모습 같아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낮에는 약간의 피로함을 느낄 때까지 함께 걸었고, 밤이 찾아와 불을 끄면 엄마는 오래전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올해의 잦았병원 덕분으많은 들을 함께 할 수 있었고, 것은 의 마음속에 닫아놓았던 삶의 이야기들을 풀어놓기에 충분했다.



언젠가부터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는 슬프게 울었다. 말도, 눈물도 꾹꾹 눌러 참고 내어놓지 않았던 우리 가족에게 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에, 음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단단히 잠가놓았던 마음속 상자를 열어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가 '브런치'라는 이곳에서 나의 마음을 꺼내어 간직하고 싶은 기억은 고이 보듬어 다시 넣어두고 잊고 싶은 기억은 써서 버려내듯, 그 시간이 신에게 부디 그랬으면 했다.



그러다 그녀의 삶이 위태로웠던 예전의 기억이 꺼나왔다. 새벽에 엄마가 겨우 기어와 내 발목을 살포시 잡았고, 옆에는 40kg이 되지 않는 여든의 할머니와 초등학생이었던 여동생이 자고 있었다. 아빠는 출근하여 보이지 않았고. 엄마에게 아프냐고 물어도 신음소리조차 내기 힘들어했다. 그야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공포스러웠던, 내 머릿속처럼 캄캄한 어느 새벽이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고 119가 바로 떠오르던 시절도 아니었으며 나는 이제 학생이 되던 였다. 한참 뒤, 할머니는 일찍 여는 약국에 가보자고 하셨고 아들을 임신했을지도 모를 일이니 그런 약이라면 주지 말라며 소리치셨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와 공장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했고 현대자동차의 거대하고 시끄러운 공장에서 아빠를 찾아 다행히 한걸음에 달려오셨다. 택시를 잡으려 하니 환자는 태우지 않는다고 수없이 거절당한 후, 다시 집에 돌아와 엄마가 겨우 낸 "119.."라는 소리에 정신없이 전화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수술이 끝난 뒤, 의사로부터 5초만 늦었어도 살려내기 어려웠을 거라는 말을 들었고 이제는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아빠는 전화로 알려주었다. 하루종일 집 전화기 앞에서 아빠전화를 기다렸지만, 수술이 길어지는 바람에 캄캄해지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아빠도 병원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우리는 모두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서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그때 엄마는 안으로 출혈이 심하여 의식이 없었던 터라 기억이 희미했던 탓에 중간중간 남은 기억을 꿰매어 남겨두고 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사실 그때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스스로를 깊이 원망했었다. 겉으로는 출혈이나 외상이 없었기에 아이의 시선으로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사실 알아챌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도 그리 영민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엄마는 '고등학생'이나 되는 내가 이웃에 도움을 청하지 않은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난 그때 '중학생'이었다고 고쳐 이야기해 주었다. 닳지도 않았던 나의 중학교 교복 차림으로 압력솥을 다룰 줄 몰라 밥을 하지 못해 할머니와 동생의 밥을 걱정하던 교복차림의 내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때 난 이웃에 도움을 청할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고 말해주었다. 생각을 하고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말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고. 그렇기에 그것이 당신의 마음에 아프게 남아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보면 언제나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우리 가족이 랫동안 말을 하지 않던 때였다. 부모님이 처음 집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때에는 이러다 괜찮아지겠지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정말 할 말이 별로 없어졌고, 일 년을 보내어 보니 날 선 대화들보다 고요한 침묵에 훨씬 편안함을 느꼈다. 그런 나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지 않는 일에 훨씬 익숙했다.


어디에고 속해있으나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느낌, 지독하게 고요해지고 있었다. 고요하고 영민함마저 부족했던 나는 이웃에 도움을 청한다는 일을 떠올리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지도 못했다고 했다. 가르치지 못한 탓이라며 엄마는 자신을 탓했으나, 그것은 가르치고 말고의 일이 아니었다. 리고 나는 엄마의 기억에는 없을 나의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주말이면 들르는 마르고 마른 아빠의 핏기 없는 얼굴, 말을 나눌 기운도 없어 보이던 생기를 잃은 그때 아빠의 모습을 말해주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던 아빠의 나날들을 알려주었다. 조금이라도 그에 대한 원망이 지워지길 바라면서.


그리고 하루종일 집에서 정확히 알 수조차 없는 엄마의 상태에 대해 걱정하며 할머니와 동생과 함께 배고픔에 시달리던 슬프고 무기력하게도 길었던 우리들의 시간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당신에게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닿을 수 있는 길을 몰랐던, 방법이 없었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몰랐다고 했다. 나 역시 몰랐다. 당신의 마음을.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것이 부모라고 할지라도 나의 마음 그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마음속 상자에서 어렵게 꺼낸 당신의 기억을 무사히 견뎌낸, 서로에게 고마웠던 시간으로 만들어 다시 마음에 넣어두었다.


엄마는 잠이 들었고. 당신이 편안하게 잠든 밤, 그것마저도 참으로 감사한 밤이었다.




"넌 네 얘기를 글로 쓰면 책 한 권은 나올 거야."

어느 날 밤, 나직이 엄마가 말했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당신에게 내가 겪은 일들을 풀어내거나 내 마음속을 제대로 내어놓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마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관심이 많은 사람, 머릿속 커다란 부분이 나로 채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의 기억엔 별 것 없던 나날들이 모두 특별하게 남아있을 터였다. 아님 특별하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할 테고. 


이렇게 실제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짐작조차 못할 테지만, 당신에게만은 영원한 나의 비밀일기장으로 이곳을 남겨둘 것이다.



그렇도록 단단히 마법을 걸어놓았으니,

부디 절대 들키지 말아 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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