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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Oct 08. 2023

1. 동거의 발단

#시작은 생각만큼 로맨틱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의 발단은 화장실 청소였던 것 같다. 


 나는 그때 더블린 코넬리 스테이션 옆에 있는 한 낡은 아파트에서 스페니쉬 걸 2명, 브라질리언 걸 1명과 함께 살고 있었다. 방 두 개, 화장실 하나의 작은 아파트였는데, 당시만 해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우리는 두 명씩 방을 나누어 썼다. 우리는 여느 셰어하우스처럼 매주 당번을 정해 청소를 했는데, 이번 주는 내가 화장실 청소를 담당하는 주였다. 


 S의 침대에서 빈둥대던 어느 주말 아침, 내가 말했다. "나 내일은 집에 가야 해" 

"왜?" 그가 물었다. 

"화장실 청소 당번이야."

"또? 너 2주 전에도 청소 당번 아니었어?"

"응 맞아. 근데 그건 키친 청소였어. 집에 가려면 귀찮긴 해도 하우스메이트끼리 정한 약속이라 어쩔 수 없어."

"자기 이번 주는 내내 우리 집에 있었고, 그 집에는 잠깐 들어가서 옷만 갈아입고 나왔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계속 청소를 하러 가야 해?" 


 그와 데이트를 시작한 것은 고작 몇 개월이었지만 우리 사이는 꽤 깊었다. 누구에게나 연애 초반은 가장 뜨거운 시기겠지만, 나는 그때 독립의 자유를 누구보다도 마음껏 누리던 때이기도 하였고, S에게 약간 미쳐있었던 상태여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다. 밤새 하는 문자도 통화도 그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줄 수가 없었다. 데이트가 끝나고 그가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면, 나는 불과 몇 시간 뒤 다시 그가 보고 싶어 부리나케 택시를 타고 그의 집으로 달려갔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잖아. 내일 청소하고 끝나자마자 다시 올게. 저녁 같이 먹자." 나는 달래는 말투로 말했다.  

 "알았어."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긍했다. 


 청소를 해야 하는 것이 영 귀찮기는 했지만,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부터 그렇게 해왔던 것이고, 그렇게라도 해야 같이 사는 친구들의 얼굴이라도 보고 안부를 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를 좋아했고, 하우스메이트들과도 매우 친했다. 해외 살이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일주일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는 '반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얼마 후 한국에 있는 친구가 파리로 유럽 여행을 온다는 소식에 나는 파리 여행을 준비 중이었다. 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도시로 부동의 명성을 갖고 있는 파리. 


 나는 들뜬 마음으로 호들갑을 떨며 S에게 물었다. "자기, 파리 가봤어? 파리는 어떤 곳이야? 엄청 예쁘겠지? 엄청 로맨틱하겠지? 맛있는 음식도 어엄청 많겠지?" 

"에이. 그렇게 기대하진 마. 참, 호텔이랑 비행기 표는 준비했어?"

"이제 하려고. 파리 물가 생각보다 엄청 비싸더라. 난 그냥 라이언에어* 탈래. 어차피 밖에만 있을 것 같아서 숙소는 호스텔이나 그냥 싼 호텔 예약하려고." 

 당시 나는 1년 간의 워홀 생활을 마치고 학생 비자로 비자를 연장한 터라 일주일에 20시간 이상은 일할 수 없었고, 그런 나의 주머니 사정이 좋았을 리가 없다.


"수리 있잖아. 비행기표랑 호텔 내가 선물로 해줘도 될까?" 그의 입장은 이러했다. 파리에 이미 가 본 경험이 있는 그는 내가 첫 파리 여행에서 좋은 경험만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행 편과 호텔을 준비해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오 마이 갓!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내 남자친구라니!' 나는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는 나의 항공편을 에어링구스*로 예매해 주었고, 파리의 한 호텔에 예약도 직접 해주었다.


 파리로의 출국  날이었다. "자. 이거 가져가." 가 신용 카드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내 신용 카드랑 내가 너에게 내 신용 카드 사용을 허가한다는 서류야. 호텔에서 조식도 먹고, 친구와 맛있는 것 먹을 때 써."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자신의 신용 카드를 척 내미는 이런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학생, 고시 공부생, 취준생 등만 만나봤던 나는 아마 반대로 돈을 뜯겨 본 적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의 배려에 엄청나게 감동했고, 며칠뿐이지만 헤어져 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파리에서 묵었던 호텔은 작지만 깔끔하고 아늑했다. 낮에는 친구와 파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밤에는, 호텔에 돌아와 S와 밤이 깊도록 말풍선을 주고받았다. 파리에서의 셋째 날 밤, 호텔에 돌아와 와이파이를 연결하니 그에게 장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수리, 내가 많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우리 정식으로 같이 사는 게 어때? 자기는 지금 거의 살지도 않는 집에 계속 방세를 내고 있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의무를 다 해야 하잖아. 그리고 자기가 일하는 곳도 우리 집에서 훨씬 가깝고. 우리 집에서 같이 산다면 차비나 방세에서 드는 돈을 좀 더 아껴서 자기가 더 필요한 곳에 쓸 수 있지 않을까? 시간도 더 절약해서 공부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도 되고우리가 사귄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은 알아. 그런데 사귄 시간이 연애의 성숙함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우리의 관계는 더 깊어질 거야. 나는 우리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무엇보다, 떨어져 있으니까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그리고 파리라는 장소가 주는 로맨틱한 분위기에 취해 그의 제안을 그냥 받아들인 것이다. 나는 가끔 정말 무모하다. 가족도 없는 타지에서, 사귄 지 6개월밖에 안된 외국인과,  이성의 동의도 없이, 감성의 부름에만 이끌려 동거를 결심하다니 말이다.


 그의 MBTI가 ESTJ라는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의 성격을 다 알고 있는 지금에 와서 그때 일을 생각해 보면 내가 그의 의도를 오해해도 정말 크게 오해했다. 그의 메시지는 로맨틱과는 정말이지 한참 거리가 먼 일종의 제안서였다. 나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구구절절한 연애편지가 아니라, 동거를 하는 것이 비용과 시간 면에서 나에게 더 이득이고, 더 깊어질 사이를 예상했을 때 남들보다 조금 일찍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제안을 하는 그야말로 제.안.서. 말이다.


 파리 여행을 준비했을 때 그가 나에게 보여줬던 배려들도 이해가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아일랜드 아니, 유럽의 최저가 항공사인 라이언 에어*를 극혐 했다(지금도 치를 떤다). 그와의 몇 번의 여행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여행 시 숙소 선택에 아주 예민하다는 것이었다(지금도 4성급 이하는 쳐다도 보지 않는다). 내가 파리의 싸구려 호스텔에 묵는 것이 그에게는 생각만 해도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자기 돈을 써서라도 내가 조금 더 좋은 비행 편을 타고, 조금 더 나은 호텔에서 묵게 하는 것이 그의 맘을 편하게 하는 것이었을 거다. 신용 카드와 함께 건네준 카드 사용 허가 서류도 마찬가지로 준비성이 철저한 ESTJ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준비 서류였다.


 사랑에 빠지면 가끔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 콩깍지가 씌었다고 한다. 그 콩깍지는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거를 하게 되면서,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S는 사실 무척이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며, 감정에 이끌려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결정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그야말로 무모한 시작이었던 동거가 그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철저히 계산된 결정이었던 것이다.


 무모하거나 무모하지 않거나, 어쨌든 우리는 동거를 하기로 했다. 엄청나게 로맨틱한 시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생각만큼 로맨틱한 것은 아니었던 그와 동거 생활이 막을 열게 된 것이다.


*라이언에어: 아일랜드, 아니 유럽 최저가 항공사. 가끔 짐 추가가 항공권보다 비쌀 때가 있는 아주 저렴한 항공사지만 그 명성에 맞는 악명 높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에어링구스: 아일랜드 대표 항공사. 라이언에어가 그냥 커피라면 에어링구스는 T.O.P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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