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생각만큼 로맨틱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의 발단은 화장실 청소였던 것 같다.
나는 그때 더블린 코넬리 스테이션 옆에 있는 한 낡은 아파트에서 스페니쉬 걸 2명, 브라질리언 걸 1명과 함께 살고 있었다. 방 두 개, 화장실 하나의 작은 아파트였는데, 당시만 해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우리는 두 명씩 방을 나누어 썼다. 우리는 여느 셰어하우스처럼 매주 당번을 정해 청소를 했는데, 이번 주는 내가 화장실 청소를 담당하는 주였다.
S의 침대에서 빈둥대던 어느 주말 아침, 내가 말했다. "나 내일은 집에 가야 해"
그와 데이트를 시작한 것은 고작 몇 개월이었지만 우리 사이는 꽤 깊었다. 누구에게나 연애 초반은 가장 뜨거운 시기겠지만, 나는 그때 독립의 자유를 누구보다도 마음껏 누리던 때이기도 하였고, S에게 약간 미쳐있었던 상태여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다. 밤새 하는 문자도 통화도 그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줄 수가 없었다. 데이트가 끝나고 그가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면, 나는 불과 몇 시간 뒤 다시 그가 보고 싶어 부리나케 택시를 타고 그의 집으로 달려갔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잖아. 내일 청소하고 끝나자마자 다시 올게. 저녁 같이 먹자." 나는 달래는 말투로 말했다.
"알았어."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긍했다.
청소를 해야 하는 것이 영 귀찮기는 했지만,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부터 그렇게 해왔던 것이고, 그렇게라도 해야 같이 사는 친구들의 얼굴이라도 보고 안부를 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를 좋아했고, 하우스메이트들과도 매우 친했다. 해외 살이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일주일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는 '반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얼마 후 한국에 있는 친구가 파리로 유럽 여행을 온다는 소식에 나는 파리 여행을 준비 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도시로 부동의 명성을 갖고 있는 파리.
나는 들뜬 마음으로 호들갑을 떨며 S에게 물었다. "자기, 파리 가봤어? 파리는 어떤 곳이야? 엄청 예쁘겠지? 엄청 로맨틱하겠지? 맛있는 음식도 어엄청 많겠지?"
"수리 있잖아. 비행기표랑 호텔 내가 선물로 해줘도 될까?" 그의 입장은 이러했다. 파리에 이미 가 본 경험이 있는 그는 내가 첫 파리 여행에서 좋은 경험만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행 편과 호텔을 준비해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오 마이 갓!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내 남자친구라니!' 나는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는 나의 항공편을 에어링구스*로 예매해 주었고, 파리의 한 호텔에 예약도 직접 해주었다.
파리에서 묵었던 호텔은 작지만 깔끔하고 아늑했다. 낮에는 친구와 파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밤에는, 호텔에 돌아와 S와 밤이 깊도록 말풍선을 주고받았다. 파리에서의 셋째 날 밤, 호텔에 돌아와 와이파이를 연결하니 그에게 장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수리, 내가 많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우리 정식으로 같이 사는 게 어때? 자기는 지금 거의 살지도 않는 집에 계속 방세를 내고 있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의무를 다 해야 하잖아. 그리고 자기가 일하는 곳도 우리 집에서 훨씬 가깝고. 우리 집에서 같이 산다면 차비나 방세에서 드는 돈을 좀 더 아껴서 자기가 더 필요한 곳에 쓸 수 있지 않을까? 시간도 더 절약해서 공부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도 되고. 우리가 사귄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은 알아. 그런데 사귄 시간이 연애의 성숙함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우리의 관계는 더 깊어질 거야. 나는 우리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무엇보다, 떨어져 있으니까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그리고 파리라는 장소가 주는 로맨틱한 분위기에 취해 그의 제안을 그냥 받아들인 것이다. 나는 가끔 정말 무모하다. 가족도 없는 타지에서, 사귄 지 6개월밖에 안된 외국인과, 내 이성의 동의도 없이, 감성의 부름에만 이끌려 동거를 결심하다니 말이다.
그의 MBTI가 ESTJ라는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의 성격을 다 알고 있는 지금에 와서 그때 일을 생각해 보면 내가 그의 의도를 오해해도 정말 크게 오해했다. 그의 메시지는 로맨틱과는 정말이지 한참 거리가 먼 일종의 제안서였다. 나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구구절절한 연애편지가 아니라, 동거를 하는 것이 비용과 시간 면에서 나에게 더 이득이고, 더 깊어질 사이를 예상했을 때 남들보다 조금 일찍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제안을 하는 그야말로 제.안.서. 말이다.
*에어링구스: 아일랜드 대표 항공사. 라이언에어가 그냥 커피라면 에어링구스는 T.O.P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