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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Oct 09. 2023

2. 룸메이트의 기준

#룸메이트가 아니라 동거인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동거를 시작하기 훨씬 전 처음으로 S에게 초대받아 그의 집을 방문한 날, 그 집에는 에밀리가 있었다. S는 방 2개, 화장실 2개가 있는 더블린 한 외곽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에밀리는 그와 같이 살고 있는 하우스메이트였다.

에밀리는 프랑스인이었다.

에밀리는 파리 출신이었다.

에밀리는 더블린에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그리고 에밀리는 여자였다.

잠.. 잠시만요. 같이 사는 사람이 여자라고요?


 더블린의 아파트는 사실 가족 단위보다는 셰어하우스로 최적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처럼 침실이 거실에서 연결되는 구조가 아니라, 현관에 들어가면 복도가 있고, 복도에서 각 방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독립적인 구조로 되어있어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에 좋다. 한 집에 여러 명이 같이 살고 있다 해도 마음만 먹으면 서로 마주칠 일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더블린에 오기 전까지는 나름 유교걸로 나고 자란 나로서는 S가 여자와 한 집에서 단 둘이 산다는 점은 결코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에밀리를 처음 만난 그날 S는 부엌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부엌에서 조금 떨어진 거실 소파에서 와인을 마시며 그와 대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을 벌컥 열고 경쾌하게 거실로 들어와 나에게 자신을 소개한 뒤 (그리고 내 소개는 들은 척 만 척 한 뒤) 갑자기 식탁 의자 하나를 부엌 앞으로 끌고 와 요리를 하고 있던 S앞에 떡하니 앉았다. 그리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도 프랑스어로 말이다. 나는 프랑스어를 알아듣지도 못할뿐더러 그녀가 부엌과 거실 사이를 떡하니 가로막고 앉아 있으니, 결국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꼴이 되어 약간 어색해져 버렸다.


"헤이 에밀리. 그러지 말고 너도 거실에 앉아서 수리랑 와인 한 잔 같이 하는 게 어때?" S가 어색해하는 나를 눈치채고 그녀에게 말했다.

"고맙지만 됐어. 난 이만 피곤해서 내 방으로 갈게! 수리, 만나서 반가웠어." 에밀리는 와인을 한 잔 따르더니 잔을 가지고 쌩하고 거실을 나섰다.

 매우 뻘쭘해버린 나를 보고 그가 말했다. "내 하우스메이트 좀 특이하지? 에밀리는 파리지앵이잖아. 하루라도 무언가에 대해서 컴플레인을 하지 않으면 못 참는 애야. 미안해."


 그 이후에도 에밀리는 가끔 같이 있는 우리를 마주치면 괜히 심술궂게 굴고는 했다. 어느 날 월남쌈을 만들어 먹던 우리를 보며 "오 마이 갓. 너네 지금 먹는 게 뭐야? 꼭 딕*같이 생겼어."라고 한다던지, 내가 S 옆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헤이 S. 저번에 초콜릿 사다 줘서 고마워. 나 이번 생리통이 너무 지독해서 초콜릿이 너무 먹고 싶었거든."라고 한다던지. 그녀는 알게 모르게 나의 심기를 툭툭 건드렸다. 그와의 관계에 조금 자신감이 생긴 나는 정식으로 그에게 불편함을 표했다.


 "S, 난 에밀리가 불편해. 너는 눈치 못 챘을 수도 있지만, 나는 에밀리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그녀는 네 하우스메이트일 뿐인데 내가 왜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어."


 다행히 S는 나를 이해해 주었고, 그때부터 에밀리에게 선을 긋기 시작했다. S가 하우스메이트로써 할 수 있었던 호의를 거두자 에밀리는 이내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얼마 뒤 더블린 시티와 가까운 곳에 살고 싶다며 이사를 나갔다. S는 다시 하우스메이트를 구해야 했고, 인터넷에 하우스메이트를 구한다는 공고를 올리고 며칠이 지나니 렌트 애플리케이션이 꽤나 모여있었다.


 "수리. 내가 애플리케이션을 좀 추려봤어. 이 중에서 방을 보러 오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어때?"

나는 그가 건넨 애플리케이션을 쭉 훑어보았다. 베스, 아만다, 피오나... 잠.. 잠깐만. 이거 뭐야? 다 여자네?

"S. 다 여자들만 지원했어?" 내가 물었다.

"아니. 난 여자 하우스메이트가 좋아. 난 지금까지 남자 하우스메이트가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어." 그의 당당한 말에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내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따지고 들려하니 그가 말을 이었다.


"헤이 수리. 진정해. 내가 여자 하우스메이트를 선호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

첫 번째, 내 나이 때 남자애들은 다 돼지들 같아. 더럽고, 안 치우고, 먹은 그릇을 씻지 않고 며칠이나 놔두지.

두 번째, 남자애들은 하우스 룰에 신경도 쓰지 않아. 물론 여자애들도 깔끔하지 못한 애들이 있겠지.(뜨끔) 그러나 자기 방이 더러운 건 난 신경 안 써. 적어도 여자애들은 같이 쓰는 공간은 더럽히거나 어지럽히지 않거든.

셋째, 남자애들은 내 것, 네 것이 없어.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도 누구의 것인지 상관없이 그냥 먹어버리면 그만이야. 여자애들은 그 반대야. 자기 물건에는 이름표를 붙여서라도 사수하지. 당연히 내 것도 절대 건드리지 않고 말이야. 수리 너도 잘 알겠지만 난 지저분한 건 질색이야. 어렸을 때부터 독립해 살면서 여자 하우스메이트가 훨씬 편하다고 느낀 지 꽤 오래야."


 그는 꽤나 논리적으로 여자 하우스메이트를 선호하는 이유를 나에게 설명했다. 미안하지만 난 태생적으로 논리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고 나는 그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S, 네 말은 이해해. 그리고 물론 내가 너랑 같이 사는 것이 아니니 뭐라고 할 입장은 안되지만 또 여자 하우스메이트를 구하면 에밀리 때처럼 감정적으로 불편한 상황이 생길 수 있어.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렌트 애플리케이션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는 게 어때? 이 사람은 어때? 프랭크. 직업도 좋고, 나이도 적당하고, 더블린에 온 지 꽤 되어서 파티를 즐기거나 할 것 같지는 않은데?"


 결국 S는 프랭크를 하우스 인스펙션에 초대했다. 프랭크는 약간 내성적의 성격의 에스토니아인이었고 런던에서 꽤 오래 살아 멋진 런던 악센트를 구사했다. S는 조용하고 멀끔한 프랭크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 그를 하우스메이트로 맞이하기로 했다.

 프랭크는 정말 있는 듯 없는 듯하여 우리는 그를 '고스트'라고 부르고는 했다. 조식, 점심, 석식까지 제공된다는 신의 직장 G사에서 일하던 그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여자 친구와 장거리 연애 중이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방에서 여자 친구와 영상 통화를 하는데에 보냈다. 그도 S만큼 깔끔한 성격이라 부엌과 거실 등 공용 공간에 있는 그의 물건은 단 한 번도 제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프랭크는 정말이지 S가 꿈에 그리던 최고의 하우스메이트였다.


 프랭크가 S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을 때 우리는 동거를 시작했다. (물론 당연히 프랭크의 동의를 얻고서 말이다) S의 동거 제안을 무작정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막상 그와 같이 살게 되니 깔끔한 성격과 무서울 정도로 정리 정돈하는 생활 습관이 살짝쿵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동거를 하면 나의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와 같이 살기 시작하니 우리는 참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S는 일단 어지르지를 않는다. 아예 치워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를 않는 것이다. 그가 요리를 한다면, 짬짬이 설거지를 하여 최대한 설거지를 줄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는 즉시 하였다. 빨래를 할 때도 세탁이 종료되기 1분 전부터 '삐-'하는 종료 소리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물건들은 다 제 자리가 있었다. 열쇠는 방문 옆 열쇠 박스에, 손목시계는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지갑은 서랍 첫 번째 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피곤하거나, 술에 취해 있거나 그의 소지품들은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반면 나는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정리 정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어 음식을 한 번 하면 부엌은 초토화가 되었다. 더블린 시티에 있던 내 침대 위에는 빨래는 했지만 귀찮아서 개지 않은 옷들이 한쪽 구석에 산처럼 쌓여있었다. 덤벙거리는 성격에 소지품을 제자리에 두지 않아 외출 시에 중요한 소지품을 찾느라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다. '오늘 할 일은 내일도 할 수 있어!'라며 귀찮은 살림은 뒤로 미루기도 했다.


 S가 지금까지 같이 살아온 하우스메이트들과 비교해 봤을 때 나는 그의 기준치에 한참 모자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나무라거나, 나를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나는 밖에서 돌아오면 항상 가방을 아무 데나 내던져 두었다. 거실 소파 옆에, 현관 앞에, 침대 옆에. 그러나 다음날 외출을 할 때면 내 가방은 여김 없이 내 옷장 두 번째 칸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마술처럼 말이다. 그러나 내 가방이 항상 제자리로 돌아와 있는 것은 마술이 아니었다. S가 내 가방에 제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묵묵히 그 자리에 옮겨 주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행동이 서서히 나를 바꾸게 했다. 한 마디의 불만도, 약간의 싫은 내색도 하지 않았던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방을 제 자리에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습관을 들이니 오히려 내 삶이 쉬워졌다. 내 독립생활의 질은 S와 동거를 시작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높아졌다.


  S가 그의 삶의 방식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했다면 우리의 동거 생활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S가 보여주었던 행동을 존중하지 않고 끝까지 내 멋대로 굴었더라면 그는 나에게 이내 실망했을 것이다. 이성 관계에서 성공적인 관계란 배려하고 존중하는 관계라고들 한다. 우리는 결혼을 생각하기 훨씬 이전부터 동거를 시작했고, 서로를 아주 사랑했지만 상대를 완전히는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어쩌면 서로가 약간 불편하고, 약간은 어려운 상태에서 동거를 시작했기에 더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딕: 남자의 성기를 낮추어 부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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