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것은 가로수 한 그루였다. 노랑, 주황, 초록이 어지럽게 섞인 나무에 우연히 시선이 꽂혔다. 매일 달력에 일정을 정리하던, 그래서 11월이 절반이나 지나가는 걸 알았지만 가을을 느끼지는 못하던 일이었다.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 나무 앞뒤로는 몇 미터마다 가로수들이 어느새 색색이 물들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개중에 변하지 않은 초록잎이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웃음이 나왔다.
일년 전, 이맘때 들었던 스피치 수업에는 자신의 명함을 만드는 시간이 있었다. A4용지를 접고 접어 손바닥 크기에 색연필과 펜으로 자신의 명함을 꾸미고 발표해야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앞과 뒷면을 완전히 다르게 구성하기로 했다. 앞 면에는 기본적인 정보를 쓰고 뒷 면은 가로줄을 몇 개 그었다. 그 위에 몇 가지 단어를 적고는 명함을 소개했다.
"이런 거죠. 서로의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좋아하는 것들을 알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뒷면에 저의 취향들을 적었어요. 처음 만난 사이라면 이것들을 왜 좋아하는지 묻지 않을까요? 이런 시간 후에 우리는 서로 잘 알게 될 거라고 믿어요."
명함 뒷면에 쓰인 단어 중 하나는 책 읽기였다. 특히 의자에 앉아 읽는 일보다 자리에서 휘리릭 넘겨보기를 좋아하는데,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대단하다길래 읽기로 했다. 소설을 몇장도 훑지 못하고 내려놓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이라는 에세이 모음집을 발견했다. 내 취향은 오히려 이쪽이었기에 그대로 책을 집어 펼쳤다.
얼마 전에 이메일로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으니 대략적인 내용만 쓴다.
며칠 전에 취직 시험을 봤는데, 그때 '원고지 4매 이내로 자기 자신에 관해 설명하시오'라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저는 도저히 원고지 4매로 저 자신을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불가능하지 않나요. 혹시 그런 문제를 받는다면, 무라카미 씨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프로작가는 그런 글도 술술 쓰시나요? 며칠 전에 취직 시험을 봤는데, 그때 '원고지 4매 이내로 자기 자신에 관해 설명하시오'라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저는 도저히 원고지 4매로 저 자신을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불가능하지 않나요. 혹시 그런 문제를 받는다면, 무라카미 씨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프로작가는 그런 글도 술술 쓰시나요?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원고지 4매 이내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제 생각에 굳이 따지자면 의미 없는 설문입니다. 다만 자기 자신에 관해 쓰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예를 들어 굴튀김에 관해 원고지 4매 이내로 쓰는 일은 가능하겠죠. 그렇다면 굴튀김에 관해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쓰면, 당신과 굴튀김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자동적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끝까지 파고들면 당신 자신에 관해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나의 '굴튀김 이론'입니다. 다음에 자기 자신에 관해 쓰라고 하면, 시험 삼아 굴튀김에 관해 써보십시오. 물론 굴튀김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민스 커틀릿이든 새우 크로켓이든 상관없습니다. 도요타 코롤라든 아오야마 거리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든 뭐든 좋습니다. 내가 굴튀김을 좋아해서 일단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시간이 꽤 흘렀기에 책의 다른 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편지가 책에 대해 아는 전부이지만, 인상은 강렬하게 남아서 아직도 마트 선반에 뉘인 생굴을 지나칠 때조차 굴튀김이 떠오른다.
무엇인가에 대해 잘 모르면서 그것을 남에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같은 맥락에서 자기소개도 남에게 소개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상태가 이치에 맞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이 누구인지 깊게 파고드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대상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면 굴튀김 이야기처럼 취향에 대해 써보는 것은 어떨까.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의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이라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싫어하는 것들을 사 오는 바보는 세상에 없다. 오히려 유한한 자원인 시간과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게 될 터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색채에 대해 말할 때 여러 가지를 좋아하더라도 가장 좋아하는 색, 가장 맞는 색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게 우리의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든다.
색채에 관해서라면 나는 초록색이 좋다.
초록 고백
'좋아하는 색이 뭐예요?'
색 취향을 물어본 지 오래다.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다가도 우리는 별 의미 없는 말로 대부분을 채우니까. 그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색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다 자기소개 시간에 물어올 때면 급하게 옆 사람과 겹치지 않으려 파랑에서 하양, 노랑에서 빨강으로 휙 휙 바꾸며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바쁘던 내 모습이 아닌가.
오늘 새벽 푸치파를 가려다 중간에 만난 빈번한 뇌우에 공포를 느끼고 핸들을 돌렸다. 숙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웃겼다. 3월의 동남아에, 낮에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청바지와 후드티에, 그것도 모자라 패딩이라니.
패딩? 패딩의 색은 초록이었다.
언제부터 나한테 초록이 많아진 거지? 사연 많은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며 기억을 더듬는다. 운동할 때 입으려고 치앙마이에서 산 바지도 초록, 어두운 옷뿐이라며 얼마 전 산 옷도 초록, 자주 입는 바지도 초록, 들고 온 가방도 초록, 가져온 모자도 초록, 한국에서 입고 온 패딩도 초록이다.
내 기억 속 초록은 나무의 색이다.
당신이 어떤 초록을 낯설게 느낀다면 필시 숲에서 그 나무색을 만나본 적 없을 거다. 다양한 나무 종을 찾아다닐 필요도 없다. 모든 색은 빛에 따라 변하니까. 결국, 당신은 자연과 친하지 않던 사람일 거다.
자연의 색은 참 좋다. 우리는 어떤 나무를 보더라도 '저 봐, 나무색 참 촌스럽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다른 빛을 갖고 있는 초록을, 우리는 구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옅은 초록, 짙은 초록도 모두 초록이고, 모든 초록은 자연스러우니까. 그리고 나는 인위를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이쯤 되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 초록의 파장을 기억하지 못했더라도, 파랑과 노랑을 섞으면 초록이 된다는 걸 이제 알았다더라도 내가 초록을 좋아하고 있었음은 틀림없다. 괜찮다.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 좋아하고 나서야 이유를 찾고 노력하지 않는가.
초록 고백을 위해 초록색 바지에, 티에, 가방을 차려입었다. 그러곤, 이 도시의 유일한 스타벅스에 왔다.
나는 초록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지난봄 태국을 여행하던 어느 날이었다. 새벽에 숙소로 돌아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웃음이 나와 적었던 글이다. 그러면서 SNS에 올렸더니 많은 친구들이 초록을 좋아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진전했던 것은 나의 일상이었다. 한동안 초록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는 초록이 이렇게도 많았구나 하면서. 초록뿐만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취향 고백은 계속되었다. 흔들린 사진첩을 쓰다가, 노스게이트라는 재즈바를 쓰다가, 것들도 겉으로 나타낼수록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는 일은 위대하다고 믿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였을 것이다. 옛 친구의 블로그에 몰래 들어갔다가 낯익은 문장을 발견했다. 누구의 말인지 생각하다 메모장을 뒤져보고는 내가 쓴 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친구가 멀리서 보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에 갑자기 오묘하고 부끄러운 감정이 생겨서 글을 비공개로 바꾸고는 얼마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언젠가 그 친구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나 글을 읽었던 것은 물론이고 감췄던 내 행동까지 알고 있었기에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중요하지는 않았다. 대화는 각자의 색으로 바래진 기억을 덧칠하는 방향으로 흘렀기에 끝에서는 좋았던 기억만 생생했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친구의 많은 것이 변했다고 느껴졌다. 친구에 대한 이런 감상을 말하다가, 나도 변했다는 말에, 그럴 리가 없다며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며, 그것도 맞는 말이라며, 행복하길 바란다며 깔깔 웃다가 생각했다.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일은 멋진 일이라고. 언제나 시간은 흐르고 취향은 변하니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취향이 일치했던 순간의 기억이랄까. 나의 문장을 그 친구가 좋아했던 일은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 친구도 좋아했으니,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세상에 멋진 일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창 밖의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처럼, 그러면서도 변하지 않은 잎들이 생경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에게 빛을 모으면서도 조화로움을 가진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