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Interview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삶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의 점액과 알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곤궁한 시대에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노력이 좀 더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내면의 목소리에 좀 더 귀기울이라고 말하고 이는 튼튼한 자의식으로 이어집니다.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고요함(Silence) 속에 두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닦습니다.
푸른색은 일반적으로 차가운 색이지만, 우주에서 가장 뜨거운 별도 푸른색이고, 가스불을 떠올려보면 가장 뜨거운 부분의 색은 푸른색입니다. 이처럼 푸른색은 양면성을 가짐과 동시에 물도 푸른색, 하늘도 푸른색이듯이 가장 근본적인 색이기도 하죠. 또한 화이트부터 블랙까지의 스펙트럼을 맑게 표현할 수 있는 색이기 때문에 주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반전되는 노란색 계열을 사용하는데 내 그림을 반전해서 보면 노란색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노란색 그림은 반전하면 파란색이 되는데, 이는 반대는 사실 보는 관점이 따라 다르게 보이며 사실은 본질을 같이 한다는 뜻을 가지기도 합니다.
정지의 시작은 그림의 완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나온 제목입니다. 추상화는 완성의 기준을 세우기가 어려운데, 사람이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면 생이 끝나듯이 그림 속의 움직임을 멈추면 그림의 완성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먹지 말라면 더 먹고 싶어 지고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 지듯이(반대의 법칙에 의해) 그림 속 움직임을 멈추려 하면 할수록 멈추지 못하는 그림이 되었고 이를 통해 움직임과 멈춰있는 양면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의 제목들은 중력, 출발의 완성, 정지의 시작, 자유의 법칙, 상승 낙하 등 반대성을 나타낼 수 있는 제목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시리즈들은 제목이 다르지만 사실 본질을 같이합니다. 하나로 봐도 되고, 개별로 봐도 좋습니다.
계획을 세우면 계획대로 하기 싫어지고, 계획을 세우지 않으려면 불안해서 계획을 세우고 싶어 져요. 그림 그리기 전 계획에만 집중하다 보면 막상 눈 앞에서 벌어지는 그림의 움직임들을 놓치는 수가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한쪽에 치우칠 수 없고 심장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듯이 반대를 왔다 갔다 하게 됩니다. 계획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림이 시작된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림이 시작되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집중해야 합니다. 몇 번의 터치만 지나가도 그 안에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각기 다른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다음 터치가 어떻게 될지는 사실 무한대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터치는 단 하나이기 때문에 그림과 얘기하고 내 내면과 협상하며 그림을 진행해 나갑니다. 내가 그린 그림이지만 나를 떠난 순간 그림은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림을 속단하면 큰 코 다칠 수 있고, 그렇다고 나를 지우고 그림을 대하면 그 안에 내가 휘말려 냉정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끝이 나지 않는 씨름 같은 힘겨루기와 비슷해요. 순식간에 끝나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걸려도 끝이 나지 않을 수도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_mmce8S5go
<정지의 시작-2015-24_작업 과정>
2015년은 작가로서 좋은 일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슬픈 한 해였습니다. 지금이 내 인생의 상승세인가 하락세인가 고민을 하다가 ‘상승 낙하’라는 제목을 생각해냈어요. 반대의 법칙에 대해 얘기하지만 내 인생으로 증명해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국 스스로 증명해내는 삶을 사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돼버렸어요. 어찌 보면 좋은 작품을 그리기엔 최적의 사람이 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이 있고, 추울 땐 따뜻함이 그리워지고 더울 땐 시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지만 흔들리는 배에서 흔들리지 않는 법은 오히려 적당히 같이 흔들거려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중립을 지키려 해도 누군 가에겐 치우쳐진 사람이 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그냥 그렇습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텍스트는 아이러니한 세계입니다. 하나의 단어가 왜 그 뜻이 되었느냐 거슬러보면 길고 긴 역사와 많은 사람들의 합의 속에 생겨났죠. 그리고 그 뜻은 추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단어도 시대에 따라 뜻이 달랐지만 지금은 다 같이 합의한 ‘그’ 뜻으로 사용하고 있잖아요. 같은 영어 문장을 가지고도 한글로 번역할 때 수많은 다른 번역이 나오고 하나의 발언에도 신문마다 해석이 다르듯, 텍스트는 생겨나자마자 왜곡됩니다. 답이라고 쓰인 고서들에 아직도 수많은 해석이 나오는 것을 보면 사람의 생각을 완벽히 텍스트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일 것입니다. 문학의 원작자도 모르는 의미들을 우리는 답이라고 배우지 않았었나요.
제가 쓰는 글도 왜곡됩니다. 왜곡된 내 생각을 글로 남겨두고 그 글에 얽매이게 되면 원래의 의도와 다른 텍스트에서 시작이 되는 작업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글을 쓰는 작업은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머리 속에 텍스트가 쌓이고 언젠가 글로 옮겨 적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텍스트가 필요 없는 작업을 하기 위해 텍스트를 만들어냅니다.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은 따로 없습니다. 기존 작품에 너무 애착을 가지면 새로운 작품을 하기 힘들어요. 예전 애인에게 애착을 가지면서 다음 연애를 깨끗하게 할 순 없는 노릇인 것처럼. 그림은 그리자마자 나에게 떨어져 나가 독립적인 개체가 되며 자기만의 운명이 있습니다.
YAP 2015년도 회장직을 맡았었어요. 순수하게 작가로만 구성된 40여 명이 모인 단체인데요. 작가가 40명이 모여있으면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4명이 모인 조별과제도 그 안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데 40명의 작가가 모인 YAP안에서는 정말 여러 가지의 일이 벌어집니다. 어찌 보면 현 사회와도 닮아있고 나와도 닮아있는 단체의 모습을 보며 내 그림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젊은 작가들끼리 서로 힘이 돼주고 있어서 서로 시너지를 내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YAP작가들에게 많은 관심 바랍니다. 많은 일에도 와해가 되지 않고 성장해 가고 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의 법칙’은 ‘정지의 시작’을 하다가 나오게 된 시리즈입니다. 아무래도 정적인 느낌으로 치우 칠 수밖에 없던 정지의 시작을 하다 보니 조금 더 과감하고 자유롭게 그리고 싶었고, 자유에 대한 역설을 표현하고자 생긴 시리즈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저도 모릅니다. 어차피 어떻게 변할지 정한다면 그대로 가지 않을 것이고요.
그래도 방향성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면 수많았던 작업의 출발점 중 ‘힘’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강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추상으로 그림의 방향을 잡기 전부터 누가 봐도 강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우주의 빛과 시간도 왜곡하는 ‘중력’이라고 생각했고, 중력은 N극과 S극이라는 반대가 붙어있는 역설적이기 때문에 생겨난 힘이란 걸 알았습니다. 더욱더 큰 반대성을 부여해서 강한 힘을 가진 그림을 그리는 것이 하나의 목표라면 목표입니다.
최승윤 작가님의 작품은 '한남동 카페 톨릭스'에서 1월 6일 수요일부터 1월 19일 화요일까지 커피 한잔과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작품은 직접 보는 감동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