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Interview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 고은 <순간의 꽃> 中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몇 달이나 울적하게 보냈다.
길을 걷다 무심코 ‘꽃이 폈네, 예쁘다’
라는 말을 했는데 옆에 듣고 있던 친구가 웃으며
‘야.. 너 이제 좀 살만해지겠다. 자연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래도 마음에 공간이 생겼다는 뜻 이래’
꽃이 보였던 그 순간을 기점으로 나는 다시 건강해졌던 기억이 있다.
작업은 자연에 대한 관찰로부터 시작되었어요. 자연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예술활동의 모티브가 되어왔고, 예술에 있어서 자연은 자신의 삶과 그의 세계관을 표현하기 위한 관심과 관찰의 대상이 되어왔었잖아요. 저에게 그러한 모티브는 꽃이었습니다. 꽃에 빛이 투과되는 모습에서 한지의 투명성을 착안하여 작업이 시작했습니다. 화면에 나타나는 소재는 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경험한 모든 자연으로부터의 기억을 화면에 표현하려고 합니다. 꽃으로부터 느껴지는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느끼는 인간의 ‘감정’을함께 표현하고자 했어요. 꽃은 인간에게 가장 매혹적인 대상인 이유가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저 역시 꽃의 매혹적 아름다움에 이끌려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 종착점은 역시 ‘감정’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감정들을 통해 ‘나만의 꽃’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1억 1천4백만 년 전 지구, 태양이 떠오른 어느 아침, 그 태양광선을 받아들이기 위해 최초의 꽃이 이 생성 위에 얼굴을 나타냈다. 식물의 삶에 혁명적인 진화를 예고하는 이 중요한 순간에 앞서, 지구는 이미 수백만 년에 걸쳐 온갖 풀과 나무들로 뒤덮여 왔다. 그 최초의 꽃은 아마 그다지 오래 피어 있지 못했을 것이다. 꽃은 매우 드물고 고독한 현상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직은 지구 환경이 꽃들이 곳곳에 피어날 만큼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결정적인 선을 넘어, 갑자기 행성 전체에 색깔과 향기의 대폭발이 일어났을 것이다. 만일 그곳에 의식을 가진 존재가 있어서 그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면……
그로부터 다시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는 그 섬세하고 향기로운 존재는 또 다른 동의 의식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인간은 점점 더 꽃에 이끌리고 매혹되었다.
-에크하르트 톨레 <NOW> 中
저에게 있어 한지는 일반적인 동양화를 전공한 사람에게 친숙하게 접하는 재료였고, 한지를 통해 먹에서 느꼈던 어떠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어요. 한지라는 물질은 투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지는 그 위에 얹혀지는 먹이나 물감 그리고 내 작업처럼 종이까지도 받아들이며 투명함과 동시에 깊이를 보여줍니다. 그러한 한지의 반투명적인 특성으로 붙여지는 한지의 양과 두께에 따라비 추워지는 색이 달라지고, 종이의 농담에 의한 깊이를 만들어 냅니다. 저는 그것이 한지가 먹과 같은 깊고도 잔잔한 울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한지라는 물성을 연구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지라는 오브제를 통해 수많은 선들과 레이어를 통해 작업을 만들어 나갑니다. 한지는 행위와 흔적이 퇴적하여 행위와 물질이 일체화됩니다. 선을 만드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나의 내면을 기록하고, 나에게 있어서 중첩된, 반복된 선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선의 표현 가능성으로 이해되었고 화면 안에서 드러나는 종이의 겹침에 의한 깊이, 주름, 그로 인해 생겨나는 선들의 리듬을 표현합니다. 작업을 해 나가면서 나는 꽃이라는 하나의 개체보다는 그것을 이루는 수많은 선에 더 집중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낀 수많은 선에서 갖게 된 체험이 제 본연의 정서와 어우러지면서 나의 선이 탄생했습니다. 화면 안에서 드러나는 종이의 겹침에 의한 깊이, 주름, 그로 인해 생겨나는 선들의 리듬으로 꽃의 아름다움과 함께 복잡하고 섬세한 감 정의선 들을 표현하고자 했어요. 수 많은 선들의 반복과 종이의 겹침은 그 자체로 그림의 바탕이 되는 동시에그 존재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이러한 선의 겹침을 표현하기 위해 선정되는 바탕색은 그 위에 붙여지는 선 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저의 작업은 밑바탕에 색이 깔리고 그 위에 흰색의 한지만을 이용하여 작업이 이루어 지기 때문에 밑바탕 작업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입니다. 작업이 단순한 꽃의 재현이 아닌 기억과 공간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색 또한 한 가지의 색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양한 기억의 색을 분채라는 재료를 통해 차곡차곡 쌓아가며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냅니다. 그 위에 얹히는 한지의 겹침만큼이나 다양한 색의 기록으로 완성되는 색인 것입니다.
작업이 나의 감정의 기록인 만큼 단순한 한 단어로 읽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림에서 느끼는 감정은 보는 사람에 따라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 다양한 감정들을 하나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제 막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신진작가로서 아직까지 배울 것도, 고민할 것도 너무 많습니다. 작업에 대한 더 많은 고민과 연구를 위해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어요.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학우들로부터의 자극과 배움은 저를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처음 작업의 출발이었던 꽃이라는 소재는 저에게 늘 소중합니다. 그러나 작업을 해 나아가며 꽃이라는 하나의 개체보다 그것을 이루는 수많은 선을 만들어나가는 시간에 대한 기록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선을 하나하나 만들어나가며 자연으로부터 편안해지던 그 순간을 환기하고 내면을 기록하며 그로부터 저는 치유됩니다. 한지는 반투명한 물질로서 예로부터 자연과 인간의 단절이 아닌 소통을 이루어내던 소재입니다. 제 작업은 그러한 한지라는 물성이 나와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자연으로부터의 치유. 수많은 감정의 기록. 앞으로의 작업은 그런 순간의 기록들로 계속될 것 같습니다.
류수인 작가님의 작품은 '한남동 카페 톨릭스'에서 1월 6일 수요일부터 1월 19일 화요일까지 커피 한잔과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작품은 직접 보는 감동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