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Interview
비바람 막아주는 지붕,
지붕을 받치고 있는 네 벽,
네 벽을 잡아주는 땅
그렇게 모여서 집이 됩니다.
따로 떨어지지 않고,
서로 마주보고 감싸 안아
한 집이 됩니다.
아늑한 집이 됩니다.
- [집] 강지인
“나는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좋은 딸’이라는 배역을 맡은 극단원이 된다. 그 배역은 25년 전에 막을 올렸지만 앞으로 언제 막을 내릴지 정해지지 않았다. 나에게 집은 좋은 딸을 연기하는 무대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 작업 노트 中
당신에게 집은 어떤 공간인가?
‘완전한 집’ 시리즈는 벽과 천장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이렇다 할 편안한 가구나, 소품들, 주거 생활을 도울 수 있는 어떠한 것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또 그 안에 가족의 모습들을 담을 것도 아니다. 본인은 불완전한 집을 그린다. 하지만 우리의 불안하고 위태로운 가정, 가족, 관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를 말하고 싶어서 제목을 ‘완전한 집’으로 지었다.
예술 작품의 1차적인 기능은 타자에게 어떠한 감각으로 보여주는 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숨기고 싶었던 나의 ‘집’을 회화로 표현하며 불완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나의 집’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을 말하고 싶었다.
“왜 우리의 집은 휴식의 공간이고 따듯한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일반적’인가?”
내가 작품을 통해 던지고자 하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어린 시절, 아침 9시만 되면 TV에서 해주던 어린이 프로의 오프닝 노래를 생각해볼까? ‘아빠가 출근 할 때 뽀뽀뽀, 엄마가 안아줘도 뽀뽀뽀,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 기억나는가? 마치 귀에 음절이 쏙쏙 박히듯이 외우고 있는 노래다.
우리는 언제인가부터 아침에 직장을 나가는 듬직한 아버지, 아버지가 일을 가시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해 주시는 앞치마를 한 어머니, 빨간 지붕과 큰 창에 레이스커튼을 한 ‘즐거운 우리 집’이 일반적인 가정의 형태로 강요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작 우리 집은 어머니 아버지가 맞벌이를 하셔서 항상 집에 계시지 않았고, 집에 숨 쉬고 있는 생물이라곤 가지를 쳐주지 않은 화초들 뿐이었는데 말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가정’이 삭막 할 수 있고, 또 불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걸 일반적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가정의 이미지 때문에 숨기고 있는 것 뿐이다.
본인이 표현하는 완전한 집은 불편하고 차가운,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가정과 가족안의 우리의 모습은 ‘좋은 아빠’나 ‘착한 딸’처럼 이상적인 배역을 맡은 배우들처럼 역할을 수행하려고 애쓰고 있는 게 아닐까?
앞의 질문에서 살짝 언급하였지만, 소위 사춘기라고 하는 중학교 시절부터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반겨 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키우셨던 '넝쿨식물들과 화초들'이 빼곡했다. 어머니께서 넝쿨식물이 자라면 벽을 타고 천장까지 덮도록 길을 잡아, 온 집안이 초록색이었다. 이 집안에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화초들이고, 뿌리를 내린 것은 가족들이 아닌 식물들 뿐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다리나 난간'은‘단절’과 ‘이어짐’이라고 설명하면 편할까? 하나의 공간 안에서 끊어지고 하지만 필연적으로 이어져있는 가족들의 관계들을 설명하고 싶었다. 어릴 때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심해서 어머니가 밖에 잠깐 나가실 때도 난간에 매달려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사색이 돼서 집에 돌아 오셨다. 아마 본인의 집이 11층이어서 더 그랬을 거다.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그 난간만 없다면 엄마가 다시 집으로 와서 날 안아 줄 거고, 내가 그 난간에 올라타서 엄마를 부르면 엄마가 달려오니 그것이 참 아이러니 하다.
'색과 모노톤'은 ‘존재’와 ‘부재’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쉽게 말하면 색이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 색이 없는 것은 존재 하지 않는 것 또는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할까? 전체적으로 의자나 쇼파처럼 사람을 위한 가구는 모노톤으로 되어있고, 이외의 식물이나 공간을 구분 짓는 얇은 벽은 색을 띄고 있다. 사람이 없으니 가구는 필요가 없고 진짜 이 공간의 주인인 식물들은 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물방울'은 불안하고 위태로운 분위기를 내기 위한 조형적인 요소이면서 내가 ‘집’의 주제를 가지고 작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등장했다. 내가 2012년에 제작한 <즐거운 우리 집>이라는 작업에서 보면 원과 구의 형태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정원일 때는 지름이 모두 같고 수학적으로 완전한 도형이지만 원이 구가 될 때는 이리저리 굴러갈 수 있는 유동적이고 불안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런 모습이 완전해 보이지만 다른 시선에서는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가족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보고 있다.
초창기의 작업은 ‘나의 집’을 가지고 제작을 했다. 유년시절에 써왔던 일기장이나 그림들이 담겨있는 스케치북 등을 보고 ‘House’라는 물리적 공간을 ‘Home’이라는 감정적 공간으로 표현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설정했다. 앞에서 언급한 화초나 구슬, 벽면, 색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감정과 가정사가 담겨있는 ‘집’을 그린다. 인터뷰를 통한 제작방식에 대상을 어떻게 찾고, 그들에 관한 인터뷰가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처음에는 가까운 주변 사람부터 시작을 했고, 이제는 그들을 통하여 점점 관계가 확대되어 연고가 없는 분들까지도 인터뷰한다. 인터뷰는 3-4일정도 진행이 되고 나이, 성별, 결혼 유무 등으로 나누어진 3가지 모듈에 맞는 짧은 설문지 작성을 시작으로 진행된다. 차를 마시거나 술을 마시면서,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인터뷰 중 그들의 현재 삶에 가장 크게 작용하고 하고 있는 스토리나 감정들을 가지고 3-5번의 러프한 드로잉을 한 후에 제작에 들어간다. 후에 작품의 '인터뷰대상'이 '전시 된 작품'을 감상 하는 것까지가 작품의 완성의 단계다.
열린 공간안에서 ‘내 집’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타인과 함께 감상을 한다. 거기서 ‘나의 집’을 세상 밖에서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이 비로소 ‘집’이 저마다 하나의 온전한 주소를 가지듯, 완전한 작품의 마침표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 ‘나의 집’을 소재로 했고 나아가 ‘타인의 집’을 그리게 되었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운명공동체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내비쳤을 때 ‘나만 아픈 것이 아니었구나, 다른 사람들도 그렇구나, 나의 가족들도 그렇겠구나.’하는 공감이 내 존재의 의미에 큰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숨기고 싶었던 것을 모두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나 자체를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과정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그 상처를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비슷한 상처를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전혀 이해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자신의 그 상처를 인정하고 내비춘다면 어떤 이는 당신을 위로하고 안아줄 것이다. 특히 가족처럼 너무도 가까워서 이야기 할 수 없었던 관계라면 더더욱 말이다.
작업과 관련된 인터뷰와는 조금 맞지 않을지도 하지만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작업과 공부, 일에 치이다 보니 행동이 우선이고 생각이 나중이 되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있다.
아직은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집’에 관한 작업을 계속 하고 싶다. 최근 물리적 공간의 ‘집’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집’의 의미에 대해 여러방향으로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또 크게는 ‘공간’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설치 작업도 구상 중이다. 잘 제작 되어서 빨리 보여드리고 싶다.
김래현 작가님의 작품은 '카페 꼰띠고 인천 차이나타운점'에서 4월 11일 월요일부터 5월 8일 일요일까지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작품은 직접 보았을 때의 감동이 있습니다.